신간소개 2013. 12. 11. 08:42




서남동양학술총서 『고려와 원제국의 교역의 역사: 13~14세기 감춰진 교류상의 재구성』은 그간 대중의 관심과 학계의 연구에서 반쯤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원간섭기’ 100년의 고려사를 교역사의 관점에서 조명한 연구서이다. 특히 원의 일방적 수탈 내지 수세적 상거래로 고려-원 관계를 파악한 기존 관점에서 벗어나 고려-원 교역의 쌍방향성에 주목한 점, 격동하던 동아시아 교역권의 큰 맥락에서 고려의 위상을 조명한 점, 흩어진 관련 자료를 한데 모아 정밀한 상호관계를 고증하고 실상을 재구성한 점 등은 이 책의 특장이다. 


13세기 후반~14세기 전반은 한반도인들의 대외활동이 비약적으로 증가해 그 어느 때보다 해외시장에 능동적으로 임했고, 한반도 시장이 세계에 활짝 열린 시기이다. 이 책은 그 배경이 된 것이 역대 어느 왕조보다 광범한 지역을 관할한 원제국이었다는 데 주목한다. 동서 교역을 장려하고 주도한 원을 통해 고려는 서아시아의 거대한 시장과 연결되었다. ‘원간섭기’ 고려 왕들이 원의 대외정책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활용해 자국의 이익을 도모했고, 이를 발판으로 고려 후기 민간교역이 활성화되었다는 이 책의 논지는 침탈과 수난사라는 인식이 주류이던 고려 후기사 연구에서 진일보한 지점을 보여준다.


일방이 아닌 쌍방의 교류: 고려의 능동적 대응 


13세기 후반 몽골과의 전쟁으로 초토화되다시피 한 고려에서 원은 응방(鷹坊)과 둔전(屯田)을 앞세워 엄청난 물자를 적출해갔다. 특히 고려 매를 징발하던 응방은 ‘고기 대신 은과 모시를 먹는 방자한 매를 기른다’는 말이 돌 정도로 원의 대표적 침탈기구로 기능했다. 

이러한 응방과 둔전은 원이 중국 강남 지역의 재원(財源) 편제를 마무리한 13세기 말부터 점차 무력화되는데, 고려는 이를 계기로 대외교역에 나서게 된다. 원의 세력권이 확장됨에 따라 회회인(回回人) 등 새로운 국적의 상인들이 고려를 찾기 시작한 것 또한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고려는 이들과의 거래를 통해 중국을 넘어선 거대한 시장의 존재를 감지했고, 고려 왕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몽골의 물자 징발기구였던 응방을 역이용해 대외무역 투자금을 조성하려는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다. 충렬왕은 응방의 존재를 묵인하는 대신 회회인을 불러 그 관리를 맡기고자 했다. 회회인들이 응방에 집적된 물자를 그들의 무역활동에 출자해 이윤을 얻으면 일정 비율은 고려 정부가 회수하는 방식으로, 응방을 활용한 대외교역을 통해 새로운 이윤 창출이 가능할 것을 계산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 강남으로 상선을 파견하고 중국 무역항의 고율관세를 놓고 협상하는 등, 이 시기 고려 정부의 전략적 사고는 사뭇 돋보이는 바 있다. 이는 13세기 후반 30여년 넘게 고려를 다스렸던 충렬왕의 승부수이자, 대외진출을 본격화한다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또한 동아시아 교역권 내에서 이류시장으로 내려앉은 한반도가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이후 충선왕과 충숙왕, 충혜왕 등 고려 왕들은 원과 연결된 서아시아의 상황과 동서 교역에 대해 지식을 축적하고 식견을 넓혔다. 고려와 원, 두개의 모국을 지녔던 이들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고려의 제도를 보호하거나 외국 제도가 고려의 상황 개선에 필요하면 주저없이 받아들였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13세기 말~14세기 초부터는 민간인들까지 원으로 건너가기 시작한다. 고려 후기 대외교역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교역의 경로도 다양해졌다. 민간인 상단이나 사신들의 교역도 육로로 들어가 육로로 귀환하던 이전의 방식에서 변화해 육로로 들어가 해상으로 귀환했다. 


정부 차원의 지원은 이런 교역양상 변화에 큰 역할을 했다. 교역을 위해 원제국을 방문하던 상인들을 위해 고려 정부가 발간한 일종의 어학교재인 『노걸대(老乞大)』 『박통사(朴通事)』 등은 그 발간 자체만으로도 원에 가는 고려 상인들의 수가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정부와 민간이 공조해 활발히 활동한 이 교역은 13세기 말 이래 70여년간 전성기를 누리며 지속되다가 원의 몰락과 함께 퇴조하기 시작한다. 


동서 세계간 교역과 원의 역할


고려에 대한 침탈은 물론 직접적으로는 원의 침공에서 비롯했지만 그 배후에는 당시의 세계사적 변동이 있었다. 12세기부터 이미 동서 아시아의 교류가 본격화되었고, 유례없이 광범위한 원의 세력 확장은 사람과 물자의 흐름에 큰 변동을 가져왔다. 동아시아의 ‘작은 시장’으로서 고려는 그 흐름에서 때로 밀쳐지고 때로 그에 편승하면서 살아남아야 했다. 


외국인의 고려 방문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변동에 따라 하나의 패턴을 형성하고 있었다. 13세기 후반 고려가 원의 침탈로 고통받던 무렵에는 한반도를 방문하던 외국 상인들도 약속이나 한 듯 발걸음을 끊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면 회회인 등 새로운 국적의 상인들이 한반도를 찾기 시작한다. 이들은 국제적으로 왕성해진 진주 거래의 보조시장으로서 고려를 활용했고, 상거래를 넘어 원 조정의 채무를 피해 오는 도피처로 활용하기도 했다. 인도와 이란 지역으로 갈 몽골인 노예를 고려에 매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제국의 판도가 넓어지고 동서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서아시아와 서역 상인들의 교역범위가 확대된 결과이다. 고려 왕들은 이를 적극 활용했고, 원의 수탈이 줄어든 기회를 틈타 외국 상인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였다.


인도와 이란에서 고위급 대표들이 찾아오고, 중앙아시아-서아시아-러시아를 잇는 광대한 노예 거래망을 오가던 상인들도 한반도를 찾아왔다. 원제국과 일본을 오가던 이른바 ‘신안 해저 유물선’류의 선박들도 한반도 인근을 통과하며 가끔 들렀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해외 시장에 대한 고려인들의 시각도 새로워졌지만, 한반도를 바라보는 외국인들의 눈도 달라지게 된다. 고려는 더이상 원제국의 복속 아래 신음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시장으로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한반도는 필요한 물산의 공급 후보지이자, 동서의 상인들이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시장이자, 동서 무역품의 구매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런 변화의 배경으로 원제국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그간 원은 고려의 모든 것을 제약하고 통제한 존재로만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실상 원제국이야말로, 12세기 후반 이래 소외되어가던 한반도 시장이 동서 교역주체들에게 주목받고, 13세기 말~14세기 초 고려의 대외교역이 다시 중흥기를 맞게 된 주요 요인 중 하나이다. 13~14세기 원은 명실상부한 동서 교역의 중심축이었기 때문이다. 원의 세력 판도와 정치상황에 따라 동서 아시아 상인들의 고려 방문 빈도와 양상이 달라졌으며, 고려는 이러한 동향을 주시하며 그에 대응하여 자국의 활로를 개척했다. 


제국의 몰락과 동아시아의 격변 속에서 


고려 왕과 정부의 능동적이고 실용적인 대응을 바탕으로 활성화된 민간교역은 14세기 후반에도 이어진다. 한번 시작된 활기는 좀처럼 꺼질 줄 몰랐다. 중국 강남 상인들의 고려 방문이 재개되어 그러한 열기를 부채질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원제국의 몰락에 따른 동서 교역판도의 변화로 일대 전환을 겪는다. 원제국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변동이 심화되자 원보초(元寶?, 지폐) 제도가 붕괴했다. 고려 정부는 그간 축적해둔 원보초를 더이상 교역자금으로 쓸 수 없게 되었고, 기황후 세력의 지나친 공물 요구로 재정까지 악화된 탓에, 중국 강남과 요양(遼陽)의 통상제안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공민왕대 말기에는 코코테무르를 통해 원의 대도(大都) 시장과 직접 교류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제국 몰락 뒤에는 해상통제를 단행한 명조가 들어서면서 고려는 더이상 동서 교역과 연동된 기존 위상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고려 내부적으로도 명의 입김을 받아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억상(抑商)’논리가 등장했고, 관료들의 무역은 금지된다. 14세기 말까지만 해도 정부의 단속과 통제에도 계속되며 과열 양상으로까지 치달았던 민간의 대중국 교역도 급기야 조선의 개국과 함께 침체기에 접어든다. 


이 책은 13세기 후반(1260~80년대), 13세기 말~14세기 초(1290~1310년대), 14세기 전반(1320~40년대 전반), 14세기 중?후반(1340년대 중반~1360년대)의 네 시기로 나누어 동서 교역과 고려의 대외교역에서 원의 역할, 동서 교역의 변화상, 고려 왕들의 능동적 교역정책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룬 100년 교역사를 촘촘히 재구성한다. 원제국의 압도적 영향 속에서 독자적 시야로 생존의 활로를 개척한 고려 후기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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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2013. 12. 9. 05:30




소외되어가는 농촌 공동체의 현실을 풍요로운 토속어와 유장한 문체로 그려내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소설가 이문구의 역작 장편 『매월당 김시습』의 개정판이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조선 초기 문인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의 삶을 특유의 유장한 가락으로 되살린 이 소설은 출간 당시 10만부 가까이 팔려나가며 큰 호응을 얻었으며, 이후로도 지금까지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에 새로 펴내는 『매월당 김시습』은 그간의 몇몇 잘못된 표기를 바로잡고 새로운 장정으로 꾸며 작품의 감동을 한층 살렸다. 난세와 불화하며 방황하는 한 천재적 개인의 고뇌가 오늘날 더욱 새로운 의미와 감동으로 다가온다. 

난세와 불화하며 방황하는 한 천재적 개인의 고뇌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일컬어지는 『금오신화』로 유명한 김시습(1435~93)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켜 벼슬길을 단념하고 초야에 은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세살 때부터 문장을 엮고 다섯살에 『중용』과 『대학』을 떼어 천재로 이름을 날렸으며, 세종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 시를 지어 ‘오세 신동’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 뒤 세상에 대한 뜻을 접고 스스로 중이 되어 전국을 방랑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2200여수의 빼어난 시를 남긴 천재 시인이자 탁월한 문장가였으며, 백성의 편에 서서 당대의 정치적 타락을 매섭게 질타한 비판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작가는 김시습의 삶의 진수를 한학에 대한 해박한 식견과 특유의 유장한 문장으로 형상화해낸다. ‘작가의 말’에서 밝힌 것처럼 “당대의 지성과 기개와 고절의 표상인 이른바 생육신으로서의 매월당의 모습보다 새롭고도 파격적인 의식과 주제와 방법을 제시한 문인으로서의 매월당, 선구적 저항시인으로서의 매월당, 그리고 그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에 주목한 이문구의 『매월당 김시습』은 김시습이 남긴 기행이나 야담을 통해 인물과 시대를 왜곡하는 일 없이 조선 초기의 혼란한 시대상과 그 속에서 한 지식인이 겪는 내면적 고뇌를 파고듦으로써 당시 유행하던 흥미 위주의 역사인물소설과는 유를 달리하는 심도 깊은 문학적 형상화로서 역사소설의 한 전범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대의 풍물을 있는 그대로 복원해낸 풍성한 토박이말과 김시습의 내면을 절절하게 드러내는 유려한 문장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이문구 소설만의 탁월함으로 읽는 이에게 감탄을 자아내며, 더불어 소설의 갈피마다 김시습이 남긴 수십편의 한시가 매끄러운 우리말로 옮겨져 있어 천재적 저항시인으로서의 김시습의 면모를 탁월하게 형상화해내고 문학적 감흥을 배가한다. 
소설은 김시습이 설악산의 관음암에 머물던 쉰살 무렵부터 채 예순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의 그의 만년의 행장을 기본 줄기로 하여, 사이사이 그의 생애와 조선 초기의 혼란한 사회상을 회상과 설명을 통해 제시하면서 진행된다. 1부 「이 가슴 씻으리니 어디가 그곳인가」에서는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협력해 권세를 누리는 훈구대신들에 대한 김시습의 질타와 서거정 등과의 교유에 얽힌 일화들이 그려지며, 2부 「산새는 정을 다해 울어주는데」에서는 공신 제도의 폐단과 이로 인해 피폐해진 민생에 대한 김시습의 한탄과 더불어 산적 수령인 말범이와의 우애, 양양부사 유자한과의 인연 등이 소개된다. 3부 「봄이 가고 봄이 오니 그 주인은 누구」에서는 유자한의 소개로 잠시 같이 지낸 관기 소동라와의 인연과, 김시습이 자신의 불우한 초상을 백이•숙제 등 고사 속 인물들과 겹쳐 묘사하는 이야기가 펼쳐지며, 4부 「저 달은 누가 나누어 옹달샘에 던졌나」에서는 영월로 유배된 단종이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날들과 함께 김시습이 단종의 초혼제를 지내는 장면이 묘사된다. 5부 「혼이여, 돌아가자」에서는 김시습이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낸 일과, ‘오세 신동’이라는 이름을 얻고 세종에게 격려를 받던 옛일에 대한 회상, 그리고 절친한 벗이었던 남효온의 부음을 듣고 크게 낙심한 뒤 설악산을 떠나기까지의 행적이 그려진다. 

독보적 문장가 이문구의 혼신을 바친 역작

이문구는 생전의 인터뷰에서 『매월당 김시습』을 쓰게 된 계기가 당시 숱한 문인들의 수난을 목격한 데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시습을 “우리나라 최초의 저항적 지식인이자 시인”이며 “시대와 불화하면서 살아낸 재야 문인의 전형”이라 평가하는 작가의 시선은 『매월당 김시습』을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문인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로 읽을 수 있게 한다. 또한 그가 그리는 김시습의 삶에서는 문인으로서 한창 왕성했을 시절을 시대와 불화하는 데 바쳐야 했던 작가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김시습의 삶을 그리기 위해 2년이 넘게 그의 발자취를 따라 전국을 다니며 고증과 연구를 거듭한 작가는 이 작품을 “철들고 온 힘을 다해 쓴 작품”이라 언급한 바 있다. 김시습과 이문구의 삶 모두가 오늘날 여전히 거듭 되새겨야 할 귀중한 전범으로 남은 것이 그 노력 덕택일 것이다. 우리 문학에서 다시 보기 힘들 독보적 문장가로 칭송받는 이문구의 문장을 통해 되살아난 김시습의 삶은 오늘날에도 더욱 새로운 의미와 감동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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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2013. 12. 9. 03:27



독일 현대문학의 상징, 크리스타 볼프의 후기 대표작 국내 초역
잘 짜인 구성, 짧은 그러나 위대하고 중요한 작품


크리스타 볼프는 독일 분단 시기 동독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차대전 이후 독일 현대문학을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가이다. ‘노동자․농민의 나라’ 동독의 건설을 몸소 체험하며 굳건한 사회주의자로 거듭난 볼프는 동독 체제에 대한 기대를 품었으나 정권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차츰 대립하게 된다. 이처럼 체제 비판적인 저항 작가로서 분단문학의 기념비적 작품들을 발표하며 동독뿐 아니라 서독에서도 확고한 명성을 누리던 그녀는 통일 직후 동독 지식인들을 향한 비판과 한때 비밀경찰에 협력했던 이력을 둘러싼 논쟁에 휩쓸려 쓰라린 내상을 입는다. 이후 동독 지식인을 겨냥한 마녀사냥에서 어느정도 복권되었으나, 그 영욕의 시간은 후기작에서도 계속된 전체주의적 체제에 대한 비판적 회고, 여성주의, 자기탐색이라는 문학적 주제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통일 후에도 볼프에게 동독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늘 곱씹게 되는 현재형 테마였고, 『몸앓이』(2002)는 그중에서도 그 문학적 결산으로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다. 이 짧지만 강렬한 소설은 자전적 체험을 바탕으로, 평생 천착해온 작가 자신의 주제의식을 섬세하고 시적인 문체로 풀어낸다.

장벽의 붕괴, 유토피아의 상실, 그 이후의 삶

“다쳤어.
무언가 탄식한다, 말없이. 의식을 잃는 순간, 고집스레 퍼지는 침묵을 향해 말들이 돌진한다. 최초의 전설적인 물결 속에서 의식이 그렇게 가라앉다 떠오르다를 반복한다. 기억은 섬과 같다. 기억이 지금 어디로 자기를 데리고 가든 거기까지 말들이 미치지는 못할 거야, 마지막 맑은 정신으로 한 생각 중 하나는 그랬을 것이다. 무언가 탄식한다. 그녀 속에서, 그녀를 둘러싸고서.”(7면)


한 환자의 병원 체류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여성 화자의 독백을 통해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발병과 수술, 치유의 과정을 다룬다. 옛 동독이 시대적 배경으로, 작가인 한 여성이 위중한 상태로 구급차에 실려 온다. 그러나 뒤떨어진 설비, 턱없이 부족한 의료품 등 병원의 현실은 동독사회가 처한 위기와 붕괴의 징후를 고스란히 드러낼 뿐이다. 소설은 “결핍의 사회”를 비추는 “사회의 거울상”인(157면) 병원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주인공 여성이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기억과 내면을 탐색하는 과정을 정제된 언어로 풀어나간다. 주인공은 현재와 기억과 환상의 세계를 넘나드는데, 발병과 치료가 이뤄지는 현재와 옛 친구 우르반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과거, 그리고 마취과 의사인 코라가 등장하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 이 세가지 차원이 서로 뒤섞이며 소설은 진행된다.
현재 시점에서는 주인공의 몸이 치료되는 과정이 세세하게 묘사되는 한편, 그녀의 시선을 통해 병원과 그곳의 인물들을 관찰한다. 물자의 부족, 위계적이고 계층화된 질서 등 병원의 모습은 여러모로 말기에 이른 동독사회를 환기시킨다. 한편 우르반의 실종 소식은 과거의 시간대로 이끌어간다. 주인공은 우르반과의 단편들을 떠올림으로써 확고한 공동의 이상이 현실 속에서 망가지고 서로 엇갈리게 된 과정을 회고한다. 

“여자는 자기 집 전화선이 공모하며 사라진 지하실, 이 작은 금속 상자가 있는 실제 도시에 한동안 살았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희망의 도시, 인류의 도시에 살았다. 그것은 그녀의 본래 고향이기도 했고 혹은 고향이 될 그런 곳, 우리가 미래에 구해내야 할 그런 도시, 우르반도 말했던 그 ‘우리’가 만들게 될 그런 곳이었다. 언젠가부터 여자는 그가 ‘우리’라고 말하면 더이상 자기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고 느꼈다.”(123면)


그러나 고위간부로 성공가도를 걷는 듯 보이던 우르반 역시 결국 “모든 희망의 싹을 밟아버릴 때를 놓”치고(164면) 한뼘 희망이 약점이 되어 당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우르반의 실종과 주인공의 발병은 동독 체제의 사회주의적 실험이 실패로 끝나버렸음을 나타내며, 병든 몸은 동독사회의 은유로서 그 의미가 더 강화된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사이, 주인공은 전신마취와 고열로 인한 환각 상태에서 무의식의 차원으로 가라앉기도 한다. 이 세계는 베를린 집의 지하실 미로이자 주인공의 뇌 속, 하데스로 나타난다. 이 세계로 이끄는 인물은 마취과 전문의 코라 바흐만인데, 그녀와 함께 주인공은 무의식의 차원으로 내려가 죽음과 고통의 지하세계를 날아다니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다. 

은유로서의 몸과 환멸 이후의 희망

볼프의 작품세계에서 ‘몸’은 사회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개인과 사회의 갈등은 인물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병든 마음은 병든 몸으로 나타난다. 『몸앓이』(Leibhaftig)에서는 아예 ‘몸’을 제목으로 내세우는데, 형용사 어미 ‘-haftig’를 붙여, 직역하자면 다소 모호한 의미를 담고 있다. 본격적으로 ‘몸’에 대해 다루되, 몸 그 자체를 넘어 비유적, 은유적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병든 몸은 의사들이 그 환부를 메스로 도려내야 하는 자연과학적 대상이자, 희망 없는 사회로부터 스스로 퇴장을 결정하는 심리적 주체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문학적 토포스로서 병든 몸은 병원체에 침입당한 신체를 넘어서서, 병든 사회에 대한 은유로도 해석된다. 발병 원인은 동독사회의 모순과 연관되고, 화자가 겪는 면역체계의 총체적 붕괴는 사회적 모순의 심각성을 암시한다. 
붕괴 직전의 국가와 몸, 그러나 각기 도달하는 종착역은 차이가 있다. 몸은 치유되고, 동독사회는 와해에 직면한다. 이 작품은 독일이 통일되고 십여년이 지나고 씌어졌다. 따라서 주인공의 발병이 사회적 모순의 은유라고 해도 결말에서 말하는 몸의 치유가 곧 동독사회에 대한 희망을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대신 작가는 괴테나 그리스 신화 같은 문학적 인용을 통해 문학의 힘, 예술로부터 얻는 희망을 내비친다.

“하지만 경계에서 움직이는 그런 영혼들이 있거든요. 더이상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닌. 가인 오르페우스가 자기 부인 에우리디케를 죽은 자들로부터 풀려나도록 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를 엿듣는 그런 영혼들요. 노래가 갖는 이런 힘이란,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가 노래하면 모든 야만적인 것이 멈추죠. 시시포스는 자기 돌에 걸터앉아요. 지옥의 개 케르베로스는 더이상 짖지 않아요. 죽음의 재판관은 왈칵 눈물을 터뜨려요. 인간의 야만적인 충동을 길들이는 수단으로서의 예술이야말로 제게 생각거리를 줘요.”(162면)


자연과학적 분석 대상으로만 환자를 대하던 의사가 환자가 읊조리는 시구를 되새기고, 신화라고는 통 모르던 코라가 “모든 야만적인 것이 멈추”게 만드는 노래의 힘에 관심을 보이는 변화는 의미심장하다. 괴테와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시가 인용되는 인상적인 마무리 역시 주인공이 도달한 치유와 삶으로의 귀환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단지 과거에 대한 은유로만 읽을 수 없는 다층적인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유토피아 상실 이후의 유토피아, 다른 희망의 가능성에 대한 암시를 추측케 한다.

posted by 아마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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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2013. 12. 9. 02:00




세계 시단을 놀라게 한 고은 문학의 위업! 

‘세계적인 시인’이라는 호칭마저 새삼스러운 고은 시인이 한국문학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묵직한 시집 한권을 새로 내놓았다. 『내 변방은 어디 갔나』와 연시집 『상화 시편: 행성의 사랑』을 동시에 펴낸 지 2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 『무제 시편』이다. 이번 시집은 총 607편, 1016쪽에 이르는 그 방대한 분량으로 우선 압도적인 대작이다. 더구나 이 엄청난 시들은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 고작 반년 만에 씌어진 것으로, 여든을 넘기고도 식을 줄 모르고 오히려 폭발하듯 분출하는 시인의 창작열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광활한 시공간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도저한 사유와 유장하고 분방한 언어로 완성된 이 거대한 시집은 가히 한국문학뿐 아니라 세계 시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위업이라 할 만하다. 

폭발하는 열정으로 완성한 607편, 경계를 넘어선 거침없는 시의 모국어

옛 시에서는 ‘곳[處]’이 ‘때[時]’이다. 이 말이 후대의 내 말인 줄 누가 알았으랴. 나에게 시의 ‘때’가 곧 시의 ‘곳’인 것.//‘죽을 때도, 죽어갈 때도 시를 쓸 수 있어?’라고 내가 나에게 묻는다면 즉각의 자문자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쓸 수 있다. 쓸 수 없다면 죽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정녕 이렇다면 시는 죽음 앞에서, 죽음 속에서 시이다. 궁극도 근원도 굳이 필요 없다.(「서문」 부분)

시집은 「무제 시편」과 「부록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제 시편」 539편, 「부록 시편」 68편, 모두 607편, 1016쪽에 이르는 방대한 시집이다. 더욱이 「무제 시편」은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 불과 반년 만에 씌어진 전작 시편이다. 수치로 따지자면 하루에 3편꼴로 ‘쏟아낸’ 셈. 시인은 올해 봄 이딸리아 베네찌아에 주로 체류하면서 4월 이딸리아 까포스까리 대학으로부터 명예 펠로십을 받고 5월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에 참가하였으며, 8월에는 칭하이 국제시인대회에 초청받아 중국을 방문하고 9월에는 22일간 시베리아를 열차로 횡단하기도 하는 등 세계 시단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이렇게 유럽과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곳곳을 오가는 여행과 체류의 사이에 폭발하는 열정으로 쏟아져나온 것이 이 「무제 시편」이다. 시인은 시집 서문에서 이 경험을 “시의 유성우(流星雨)가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내렸다”라고 돌이킨다. 그러나 『만인보』가 그러하였듯이 이 시집 또한 단순히 양의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꿰뚫어보는 예감과 시대에 맞서는 투철한 역사의식, 삶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이 어우러진 우주적 상상력의 시세계는 물론이고 가히 초인적이라 할 만한 이 ‘청년 시인’의 식을 줄 모르는 창작열에 경탄해 마지않을 것이다.

「무제 시편」, 명명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대자유, 모든 규정과 개념을 넘나드는 도저한 시정신

책을 덮는다 캄캄하다 캄캄하기만 하다//겨우/이 지상에는/붓다나 누구밖에 없다/너와 나밖에 없다//인간을 긍정하는 것도/인간을 부정하는 것도/인간밖에는/아무도 없다//풀도 물속 전갱이들도/달도/별들도/인간의 가치를 전혀 알 바 없다//이토록이나/모르는 대상이 인간이다 나이다//깊은 밤에 이르러 도달한 것/내 생애란/이 세상의 아무도/알 바 없는 그것//의미의 무의미 그것//캄캄하다/캄캄하다 자꾸(「무제 시편 529」 전문)

「무제 시편」을 통해 시인은 대륙과 대륙을 넘나들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도저한 시정신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으며, 한편 한편 비범한 시적 사유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은 추천사에서 이를 “찰나에서 찰나로 미끄러지는 죽음의 시편이요, 그 찰나 찰나가 해탈의 이행(履行)으로 되는 초월의 시편”이자 “자유, 대자유, 마침내 자유조차 잊는 그런 자유함”이라고 찬탄한다. 시를 둘러싼 모든 편협과 속박마저 떨치고 ‘시의 모국어’라 할 드넓은 대지를 탐사하는 이 대시인의 발길은, 달리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 시의 독보적인 성취이자, 한국문학뿐 아니라 세계 시사에서 유례가 없는 위업이라 할 만하다. 
시인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서 온 생애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뇌하며 세상 만물과 “어제의 나/그저께의 나만도 못한 오늘”(「무제 시편 63」)을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되새기고, “언제까지나 목마른 세상 내려다보”(「무제 시편 6」)면서 “만성(慢性)의 번뇌 행렬”(「무제 시편 1」)을 좇아 “더 가야 할 시의 길”(「서문」)을 찾아 나선다.

감히 나는 내가 흑조(黑潮)임을 선언하노라/내가 뭍 골짝 개울이 아니고/허허벌판 난바다를 휩쓸어/나의 길 한 마당을 이룬 흑조임을 선언하노라//감히 나는 달의 맹방(盟邦)임을/새삼스러이 선언하노라/지상의 아수라 국가들의 수교 따위가 아니라/나의 영원한 위성 달빛과의 우정을 선언하노라//(…)//그 어느 바다 연해인들/그 어느 대륙 연안인들 곶인들/그 어느 반도 부속 도서인들/그 어느 암초 산호초인들/아 그 어느 심해 해저인들/나의 의지 고루 펼쳐져 가 있음을 선언하노라//(…)//나는 흑조임을 선언하노라 내 절망과도 같은 명예로 선언하노라(「무제 시편 3」 부분)

금방이라도 쏟아져나올 듯 일상 속에 늘 시가 울먹울먹 차 있는 시인에게는 문학이 삶이고 삶이 곧 문학에 다름 아니다. “오직 이 세상의 삶 하나로 살아야 할”(「무제 시편 114」) “숙연한 삶 가녘에/내 삶은 송구스러운 더부살이의 삶”(「무제 시편 4」)일 뿐이라고 낮추어 말하지만 시인이 어둠의 시대를 치열하게 관통해왔음은 익히 아는 바이다. “이제 타버릴 일만 남은/재가 될 일만 남은 세상”(「무제 시편 97」)에서 시인은 “세상 최악의 것인/이데올로기들”(「무제 시편 105」), “이놈의 결과주의/이놈의 근본주의/이놈의 실용주의”(「무제 시편 390」)를 다 내던지고 “시로부터의 해방인 시, 시로부터 시 아닌 시에의 하염없는 지향의 시”(「서문」)를 꿈꾼다. 이로부터 시에 있어서 “나의 정본(定本)은 없다”는 시인은 단호하게 말한다. “언어를 놔두라. 스스로 어긋나게 하라. 스스로 미쳐 날뛰게 하라. 스스로 자지러져 불타고 물결치게 하라.”(「서문」)

나의 시는/다른 시를 죽였다/나의 언어는/어제의 언어와/내일의 언어를 쫓아냈다/모든 언어는/모든 시대를 등졌다/모든 삶은/모든 삶의 9할을 놓쳤다//그 피와/그 피눈물과/그 뼈와 살점의 고통들을/그 순결한 욕망들을/그 멍한 희망들을/가장 먼 곳에서/흰 구름과 아지랑이로 지웠다//너무나 미혹의 언어로/너무나 매혹의 언어로/진실이 아니라/진실의 그림자에 매달렸다//나의 시는 죄이다/나의 시는/징벌을 앞두고/징벌을 모른다(「무제 시편 10」 부분)


「부록 시편」: 시인의 또다른 미래를 예감하는 새로움

이어지는 「부록 시편」은 「무제 시편」과는 별도로 『상화 시편』과 『내 변방은 어디 갔나』 이후 발표한 근작시를 간추린 것이다. ‘부록’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나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한권의 시집으로 묶기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시인 역시 애초에 「무제 시편」과는 별도로 엮을 생각이었던 것을 “안성 시대를 마감하는 내 최근의 동정(動靜)에 따라 부록으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어제 그제 그대로/그냥 시인”으로서 “날마다 절정이었”던 30년간의 안성 시대를 마감하고 “또 하나의 해설픈 시작을 위하여”(「안성이여 안녕」) 최근(2013년 8월) 수원 광교산 자락에 터를 잡은 시인의 감회가 오롯이 담겨 있다. 더불어 “지상의 한 장소에서/다른 장소의 진실들을 꿈”(「어느 전기」)꾸는 “욕망으로부터 가비야이/문명으로부터 가비야이/언어로부터/삶과 죽음으로부터 가비야이/9차원”(「하직」)의 세계로 나아가는 시인의 변모를 또한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한시(漢詩) 5편(「달마 보내기」 「절로 읊조리기〔自吟〕」 「안부」 「행로난(行路難)」 「무제」)을 읽는 새로운 맛도 즐길 만하다. 

‘성(聖)’과 ‘선(仙)’조차 뛰어넘는 시인의 새로운 경지

올해로 등단 55년에 이른 고은 시인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 그대로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젊은 시절 “고은 시집을 공부 삼아 읽다가 그만 뿅 가버렸다”는 한 시인이 일찍이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 여전히 청춘으로 사는 귀신”(안도현, 『내 변방은 어디 갔나』 추천사)이라 이른 바 있거니와, 오늘 또 한 젊은 시인은 “시 없이는 이미 죽었을 사람, 시 있어서 평생 살아남을 사람, 도통 시로밖에 설명이 안되는” “천상 시인”(김민정, 추천사)이라고 명명한다. “나는 돼지가 되어서도/시인이련다”(「궁한 날」)고 당당하게 말하는 ‘영원한 청년 시인’. 도무지 시인으로서의 높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경이로운 존재. 이 불가해한 시인을 우리는 ‘시공을 넘나드는 시귀(詩鬼)’라고밖에는 달리 이를 말이 없을 듯하다. 이로써 시인은 마침내 ‘성(聖)’과 ‘선(仙)’을 뛰어넘는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하나의 밤을 온전히 지새운 아침 이슬을 밟는다/갖은 지상의 욕망들을 재운 뒤/저 혼자 남겨진/아픈 그리움으로/혹은/아픈 외로움으로 정화될 대로 정화된 대기 속에/나의 숨결을 내보낸다//(…)//이로부터/저 고려의 처음인 묵은 광교의 지난날로부터/이제 막 태어난/태(胎) 비린내/젖비린내 나는 어린 삶의 시작이리라/그리하여 광교의 돌이리라 풀잎이리라 저녁 새들이리라/그리하여/침묵이리라 어느날의 천둥소리이리라/그리하여/수원 광교산/내일의/내일모레의 깃발 같은 앞과 뒤의 황홀이리라//이로부터/광교의 푸른 하루하루가 열리리라/오늘이 천년을 앞두고/오늘이 천년을 등지고 호호망망 열리리라(「광교에 들어와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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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2013. 12. 6. 08:35



우리 시대 대표 육아멘토 서천석,
그가 육아에 지친 부모에게 전하는 따스한 위로와 격려 


서천석은 텔레비전(EBS 60분 부모, KBS 아침마당), 라디오(MBC 여성시대, MBC 마음연구소), 신문, 잡지, 네이버캐스트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부모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은 의사’ ‘막연한 원칙이 아닌 현실적인 답을 주는 의사’라는 평을 받으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육아멘토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그는 진료실에서 아이와 부모를 상담하며 느낀 단상들과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직접 해 준 말들을 꾸준히 트위터에 남기고 있는데, 이 말들은 하루에도 수백 건씩 리트윗되며 아이와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부모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전의 아이들은 대가족과 이웃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품속에서 저절로 자랐지만, 요즘은 오롯이 부모의 힘만으로 아이를 길러 내야 한다. 직장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도 오직 부모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 책의 저자 서천석은 이 시대의 부모가 느끼는 피로와 압박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면서, 육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부모들에게 따끔한 꾸중 대신 따스하고 현실적인 격려를 건넨다. 좋은 부모가 되려고 노력하다가 자신과 아이를 채찍질하게 되는 상황을 우려하며 ‘행복한 육아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느슨하게 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조언은 내가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지, 내가 과연 좋은 부모인지 항상 불안해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부모들의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준다. 또한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고 독려함으로써 부모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보자고 손을 내밀어 주는 책이다. 

나도, 아이도 미성숙한 존재 
부모와 아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사랑 


많은 부모가 아이 앞에서는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부모가 되었나 몰라.”라고 하면서 인간적인 모습을 내비치다가도 아이 앞에서는 누구보다 근엄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완벽한 부모의 모습으로 아이를 가르치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완성된 부모, 준비된 부모’는 없으며, 사람은 부모가 된 순간부터 부모로서 성장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족하고 아직 미숙하지만 그런 모습을 인정하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성숙해 나가는 게 오히려 어른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뿐만 아니라 아이를 바라볼 때도 중요하다. 아이는 당연히 미성숙한 존재이며 허물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육아의 중심에 두고 결과에 집착하면 육아는 무거운 짐이 된다. 때문에 저자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로부터 아이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며 부모가 행복할 수 있는 육아가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문제없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부모들에게 오히려 ‘내려놓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공부, 사춘기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조언


저자의 첫 책인 『하루 10분, 내 아이를 생각하다』가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와 철학에 집중했다면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는 그러한 내용과 더불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조언들까지 충실하게 담았다. 아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부모가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지 막막할 때가 많다. 또한 아이와 갈등을 겪을 때면 부모 역시 자기 감정에 휘둘려 아이에게 이성적인 태도를 보이기가 쉽지 않다. 이 책에는 아이와 갈등 상황에 있을 때 부모가 감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아이와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말들이 구체적인 대화로 제시되어 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더라도 소리 내어 읽어 보고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네 본다면 아이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풀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린아이를 둔 부모뿐만 아니라 초등학생,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법, 아이의 공부를 도와주는 법 등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소아정신과 의사이자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저자가 직접 시도해 본 말들과 방법들이기 때문에 더욱 신뢰가 간다.

짧은 글에 담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 
아이의 마음을 표현한 섬세하고 서정적인 그림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는 저자가 트위터에 남긴 글을 바탕으로 만든 책이다. 수많은 글들 중에서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글을 가려 뽑고, 매체의 특성 상 짧게 줄여서 적을 수밖에 없던 글을 다시 가다듬어 책으로 묶었다. 저자는 비교적 긴 호흡의 글을 묶어 낼까, 짧은 글을 묶어 낼까 고민하다가 ‘그렇잖아도 버거운 육아에 책 읽는 부담까지 얹어 주고 싶진 않았다’고 하면서 이러한 책의 형식을 선택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육아는 결국 실천이다. 부모의 표정이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머리로는 잘 알고 있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다. 이 책에 실린 글들 역시 비록 길진 않지만 결코 가벼운 내용은 아니며 실천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하루에 한 문장이라도 마음에 새긴다면 아이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분명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 책의 그림은 그림책 작가 박보미가 그렸다. 아이들의 섬세한 마음과 아기자기한 동세를 맑고 투명한 화풍으로 그려내 글이 표현하는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살려 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이들이 커 가며 겪는 크고 작은 고비들, 부모들이 육아를 하면서 느끼는 감정의 편린들이 섬세한 그림으로 펼쳐진다. 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그림들은 부모가 아이들의 마음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며 육아에 지쳐 건조해진 부모의 마음 또한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리라 믿는다.

posted by 아마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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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2013. 12. 6. 06:30



남자를 위하여 -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

김형경 심리 에세이



여자도 모르고, 남자 역시 잘 몰랐던 남자 이야기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포착해온 소설가이자 『사람 풍경』『천 개의 공감』『만 가지 행동』 등으로 유명한 국내 최고의 심리 에세이스트인 김형경 작가가 이번엔 남자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남자들, 신화와 소설에서 만나는 남자들의 내밀하면서도 찌질하고, 슬프고도 아픈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새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한 외로운 인간의 모습을 만나고 그를 위로하게 된다. 여자들이 잘 모르는, 남자들 스스로도 잘 몰랐던 남자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반씩을 채우고 있으면서도 온전한 하나를 이루지 못했던 남자와 여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활짝 열게 될 것이다. 


남자, 당신은 누구십니까


남자와 여자는 가족, 친구, 연인, 동료, 또는 그저 아는 사람, 스쳐지나가는 사람 등 어떤 식으로든 늘 옆에 있고 함께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서로를 탓하고, 한편으로는 서로에게 사랑과 위안을 갈구한다. 어쩌면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더욱더 서로를 알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왜 첫사랑을 잊지 못할까? 남자들은 왜 중요한 순간에 여자를 버리고 도망칠까? 남자들은 왜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까? 남자들은 왜 자동차의 작은 흠집에도 그토록 흥분할까? 남자들은 왜 여자의 성공을 두려워할까? 남자들은 왜 여자와 친구가 될 수 없을까? 남자들은 왜…… 이렇듯 남자들에 대한 일상의 의문들은 끊이질 않고 잘 풀리지도 않는다. 


남자,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아마 여자들은 평생을 살아도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지 모른다. “남자로도 살아보고 여자로도 살아봤던”(155면) 그리스신화 속 테이레시아스나 알 수 있을까. 저자는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 날카롭고도 유쾌한 시선으로 주변의 사례와 진솔한 경험담을 나누며, 남자를 알아가려는 노력이 한 인간의 내면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일인 동시에 자신을 들여다보는 의미있는 과정이 되길 응원한다. 


술을 따라주는 것이 안부를 묻는 일이고, 술잔을 서로 부딪치면서 상대를 위로하고, 각자 자기 잔의 술을 마시면서 슬픔을 느낀다. 술자리에 마주앉기, 함께 술 마시기, 함께 취하기,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남자는 위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는 말을 할 줄 모르고, 상대방을 감싸안아 편안하게 해주는 행동을 할 줄 모른다. 술자리는 그 자체로 남자들이 감정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그들은 슬프다고 말하는 대신 술을 마시고, 기쁘다고 말하는 대신 노래방에 가서 큰 소리로 노래 부른다. 우리나라 특산품인 ‘폭탄주’의 이름은 그 술잔을 돌릴 때 남자들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훌륭한 은유이다. (98~99면)


남자들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좋아하면서 자기들의 언어가 여자들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 자기들의 언어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데 반해 여자들의 언어는 산만하고 무질서하다고 폄하한다. 남자들이 그런 언어를 사용하는 진짜 이유가 감정을 표현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서 듣고 싶어하는 말은 부드러운 위로와 사랑의 말일 것이다. (102면) 


남녀 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위한 김형경의 조언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남자의 관계, 열정, 부정적 감정, 변화를 키워드로 삼아 남자의 마음속 이모저모를 들여다보고 이를 바탕으로 남녀 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1부 ‘남자의 관계 맺기’는 남자들이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하는 성격과 성향이 성인이 된 후의 관계 맺기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다룬다. 어머니와의 애착관계가 이후 남자들이 맺는 친밀한 관계의 원형으로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례들을 살피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경쟁심과 남자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의 근원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2부 ‘남자의 열정 사용법’은 남자들이 생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다룬다. 여성들은 친밀한 관계에서 자신의 리비도의 대부분을 남자에게 투여하지만, 내면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데 불안을 느끼는 남자들은 대신 술과 자동차, 혹은 사물들에 자신의 리비도를 분산해서 투자하기를 즐기는 것. 또한 남성들에게 모든 감정과 욕구를 해결하는 유일한 창구인 ‘섹스’에 대한 고찰과, 욕망 그 자체인 남자의 시선에 대한 고찰도 흥미롭다.


3부 ‘남자의 위험한 감정’은 남자들이 내면에 억압한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감정 영역들을 다룬다. 남자의 충족되지 못한 의존성, 상처받은 나르시시즘이 어떻게 분출되어 관계를 다치게 하는지를 살피고,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외부의 두려운 대상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는 남자들의 방어기제들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4부 ‘남자의 삶과 변화’는 앞에서 다룬 내용을 바탕으로 남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남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함께 고민하며, 여성이 주도해나가는 남녀 관계 변화에 대해 남자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그를 통해 여성과 남성이 어떻게 조화롭게 관계를 맺고 지낼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책에는 문학작품이나 신화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과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남자들의 다양한 사례가 담겨 있어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저자는 이러한 다양한 사례와 참고서적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면서 해박한 심리학적 식견과 특유의 통찰로 남성들의 내면과 남녀 관계를 날카롭게 들여다본다. 이를 통해 저자는 남녀가 서로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들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며, 먼저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함께 고민할 것을 제안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외롭고 심심하고 속상한 남자와 여자들에게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울컥하기도 하고 뜨끔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책 곳곳에 배어 있는 저자의 따뜻한 통찰은 여성들에게는 남자들에 대한 환상과 오해를 덜어낼 수 있는 기회를, 남자들에게는 자신도 깨닫지 못한 자신의 내면을 깨닫고 위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럼으로써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내 남자, 내 아버지, 동아리 선배, 기러기 아빠 김부장님, 경비 아저씨의 마음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답답하고 복잡했던 남녀 사이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저자가 말하는 대로, 서로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의존성을 버리고 서로가 스스로 어른이 되어가기 위해 한발짝 더 내디딜 수 있게 된다. 


남녀가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이 하나 있다면 각자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숙한 생존법, 성격의 왜곡된 측면을 알아차려 각자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면의 불편이 해소되고 관계가 개선된다. 자기 마음이나 행동은 볼 줄 모르면서 상대방을 원망하던 태도가 바로 문제의 핵심이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326면)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대 이름은, 남자


김형경의 신작 에세이 『남자를 위하여』 출간을 계기로 창비에서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재미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본격 ‘(사랑) 싸움 유발’ 설문조사! 남자는 왜?>라는 타이틀로 ‘도무지 알 수 없는 남자 베스트’를 뽑는 이벤트였다. 지난 11월 13~16일, 페이스북(창비,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 도서)과 교보문고(영등포점, 종로점, 강남점), 영풍문고(종로점, 김포공항점), 반디앤루니스(종로점) 등 SNS와 대형 오프라인 서점을 통해 진행된 이벤트에서는 3,500여명의 남녀가 활발하게 참여해 ‘이해할 수 없는 남자 유형’의 순위를 매겼다. (설문 항목에 해당하는 남자들의 사례는 책의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남자라면 한두번, 혹은 일곱번 모두 속으로 뜨끔해할 ‘도무지 알 수 없는 남자 베스트 7’의 결과는?



1. 한번 웃어줬더니 자기 좋아하는 줄 착각하는 남자(25%)

2. 수천번 얘기해도 양말 뒤집어 벗어놓는 남자(20%)

3. 여친이랑 길 걸으면서 오만 여자 다 스캔하는 남자(19%)

4. 술만 마시면 구여친 드립하는 남자(14%)

5. 아내가 먼저 승진했다고 속상해하는 남자(8%)

6. 밥 먹으면서 한마디도 안하는 아버지와 아들(8%)

7. 카메라 모으다가 이젠 자전거에 빠진 남자(5%)


설문 결과 1위는 참가자의 25퍼센트가 공감한 ‘한번 웃어줬더니 자기 좋아하는 줄 착각하는 남자’가 뽑혔다. 김형경은 이러한 남자의 심리를 “여자의 유혹에 약하게 진화되어”온 진화심리학과 “남자의 나르시시즘”, 미국 저널리스트 로저 로젠블랫의 저서 등을 통해 흥미롭게 설명한다. (3부 2장)


“웨이트리스는 당신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니다.” (…) 남자들이 웨이트리스가 웃기만 해도 자기를 좋아한다고 착각하여, 주문을 받은 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와 사랑의 도피행을 꿈꾼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실제로 까페나 식당에 가면 남자 손님들은 주문받으러 온 여종업원의 낯빛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 남자들이 그토록 유혹에 약한 이유는 그들이 치명적 나르시시스트이기 때문이다. (184~85면) 


『사람 풍경』으로 시작된 소설가 김형경의 심리 에세이들은 표현할 길 없었던 사람들의 복잡한 마음을 간결하고 담담한 언어로 대변하듯 정리해주며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시간이 거듭될수록 온기가 더해지고 연륜이 깊어지는 그 통찰은 거기에서 배어나오는 여유와 너그러움으로 독자에게도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남자를 위하여』는 주변의 남자들에게 상처받은 여자들,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어 불편해하는 남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겪게 될 무수한 고비들을 현명하게 이겨낼 수 있도록 돕는다. 남자를 위하는 현명한 여자를 위한, 여자를 위하는 진솔한 남자를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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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2013. 12. 6. 02:00



동아시아론의 선구적 주창자가 제시하는 동아시아 평화•공생의 길

한국•중국•일본•대만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과 연대해오며 동아시아 담론을 명실공히 “새로운 지적 공론(公論)”으로 세워냈다는 평을 듣는 백영서(연세대 국학연구원 원장, 『창작과비평』 편집주간)의 신작 사론집(史論集)이 출간되었다. 국내 주요 계간지에 발표하며 이슈를 불러일으킨 글을 비롯해 해외학술대회 등을 통해 현지의 비판적 지식인들과 나눈 교감을 담은 글이 담겨 있다. 

전작 『동아시아의 귀환』(2000)이 냉전시대의 협소한 지역인식을 극복하는 참신한 전망을 제시하며 이후 10여년간 ‘동아시아 담론 풍작시대’를 열었다면, 이번 책은 과연 이 담론이 동아시아 국가 간 대립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어 공생사회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실천과제로서의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네가지 키워드

이 책의 제1부 ‘실천과제로서의 동아시아’는 저자가 1990년대 초부터 숙성시켜온 동아시아 담론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해볼 수 있는 여러 키워드들을 논의하고 있다. 저자를 비롯한 동아시아론 연구자들이 선구적으로 동아시아론의 체계를 세운 90년대 초만 해도 많은 이들은 ‘87년 민주화 이후의 정세’ 아래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새롭게 발견된 것일 뿐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하는 편이었다. 이러한 안팎의 오해에 대해 저자는 “동아시아 담론이 19세기 말부터 논의된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사상사적 계보에 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실천적 과제임을 인정받고자” 했다.

전작 출간 이후 10여년이 지나 펴낸 이번 책은 ‘동아시아란 무엇인가’라는 여전히 논쟁적인 질문을 던진다. 동아시아는 기존의 ‘한•중•일 더하기 몇몇 국가’ 식의 고정된 지리 개념이 아니다. 동아시아라고 함은 동북•동남 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 전반이 공통으로 지닌 문화유산 또는 대대로 이어져온 지역 내 교류나 경험이 재구성되는 과정에 다름없다. 즉 고정된 실체가 아닌 변화무쌍한 과정으로서의 개념 설정이 필요하며 이는 이번 책에서 ‘실천과제로서의 동아시아’라는 개념으로 압축되어 표현되었다.

‘실천’과 ‘경험’을 통한 동아시아 바로 보기에는 다음의 핵심용어들이 필수적이다.
첫번째 키워드는 이 책의 프롤로그를 비롯해 책 전반에서 소개되고 있는 ‘핵심현장’이다. 저자가 꼽는 동아시아의 대표적 핵심현장은 진먼도(金門島, 대만), 오끼나와(沖縄, 일본), 개성(開城, 한반도) 등이다. 2010년 하또야마(鳩山) 총리가 오끼나와 미군기지를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번복하면서 그 이유로 당시 천안함사건 이후 미군 유지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 이는 바로 한반도 남북과 일본 등 동아시아가 핵심현장을 중심으로 어떻게 연동하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당시 오끼나와의 시위 현장을 찾은 저자는 만약 “우리 한국인이 6•15선언의 기조에 따라 남북화해를 심화시켰더라면…”이라며 쓰라린 회고에 잠긴다.

핵심현장을 수차례 드나들면서 현지 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저자가 느끼는 고민은 이뿐 아니다. 과연 현장의 구체성에 근거하면서 그로부터 사상적인 차원의 과제를 끌어낼 수 있는가? 이에 관하여 내놓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복합국가’다. 저자는 한반도 분단이라는 생생한 현실을 토대로, 남과 북이 서로의 국가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서서히 재통합하여 “단일형 국가가 아니라 한층 더 인간다운 삶을 구현할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가자고 제안한다. 이를 우리가 익히 아는 연방제 등의 ‘국가 간의 결합’이라고만 이해한다면 절반의 이해일 것이다. 복합국가론의 핵심은 오히려 ‘국민국가의 자기전환’ 즉 국가의 한계를 극복하는 사회 내부의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에 담겨 있다. 또한 재일조선인•이주노동자•북한이탈주민 등의 정체성이 지닌 다양함과 유연함을 끌어안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더해지면서 일견 추상적인 담론에 그칠 수 있는 지점에 생생한 실감을 더한다.

국가/탈국가 담론이 적용되는 공간은 비단 한반도뿐만 아니다. 지금 동아시아에서는 국민국가를 상대화하는 탈근대 담론이 주를 이루지만, 다른 한편 대만독립론이나 오끼나와독립론처럼 근대국가 형태를 지향하는 국민국가론도 그 세가 만만치 않다. 동아시아 전체의 이같은 현실을 다각도로 조명하며 저자가 벼려온 사상적 과제가 바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적 단일과제’ 즉 ‘근대의 이중과제론’이다. 적응과 극복이라는 얼핏 상호 이율배반적이라고 여겨질 법한 이 이론에 관해 다양한 주장을 곁들여 해설하는 부분(59~67면)은 매우 흥미롭다. 저자는 이론의 뿌리를 백낙청(白樂晴), 최원식(崔元植) 등에게서 찾으며 더 나아가 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의 근대초극론에서부터 쑨 거(孫歌) 등의 동아시아론까지를 섭렵하는데, 여기서 ‘근대의 이중과제론’은 곧 “상대를 변혁하고 자신도 변화하는” 운동으로서 자리매김된다.

2001년 대만과 일본에서 체류한 경험을 토대로 구체적인 실감이 더해진 ‘이중적 주변의 시각’이라는 키워드 또한 흥미롭다. 그는 두 나라에서 각각 “중국의 일부이기도 하고 중국이 아니기도 한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대만인”과 “한때 식민지였던 대만을 보는 일본인”들을 만난다. 이 두가지 얽힌 시각을 접하면서 서구 중심의 세계사 아래에서 비주체적 발전경로를 강요당해온 ‘동아시아라는 주변의 눈’과 ‘동아시아 각국의 권위주의하에서 억눌려온 주변의 눈’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이중적 주변의 시각’이라는 표현으로 압축해낸다.

현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몇가지 물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대화이기도 하다.” 저자의 이 말은 지금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다시 말해 한중관계사에서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을 변별하고 양자의 역학관계를 파악해내는 작업은 곧 한중관계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유효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다면 한중관계에서 그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책의 제2부 ‘주변의 눈으로 본 중국’에서는 양국 관계의 ‘비대칭성’ ‘근접성’ ‘한국(조선)의 지정학적 위치’를 ‘변하지 않는 것’으로, 또한 ‘변하는 것’으로는 ‘시민사회의 다양화’ ‘상호의존성 심화’ ‘제3자 강대국(일본•미국 등)’ 등을 꼽으며 임진왜란부터 청일전쟁을 거쳐 현재의 동북공정, 한류 등에 이르는 다양한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풀어내 이해를 돕는다. 국내에서 출간된 연구논문의 시기별 목록, 동료 연구자들에 대한 직접 인터뷰 등의 실증적 분석결과 등은 한국인의 중국 인식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로 손색없다.


흔히 중국의 일부로 인식하는 대만의 정체성에 대한 재인식도 필수적이다. 저자는 본인 또한 대만을 “중국의 한쪽”으로만 알고 있었다고 돌이켜보며 대만사회 내부의 인식을 파고든다. 즉 대만은 중국의 일부가 아니며, 대만 토착사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대만인으로서의 독자적 정체성”을 주목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에 관한 제2부 3장과 4장은 대만의 대표적 소설가 우 줘류(吳濁流)의 중국여행기와 필자 자신의 대만사(臺灣史) 연구를 위주로 중국과 대만,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다.


현대 중국에 관해 전세계가 주목하며 한편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제국으로서의 중국’이다. 저자는 왕 웨촨(王岳川), 쉬 지린(許紀霖), 거 자오광(葛兆光), 자오 팅양(趙汀陽) 등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들의 담론을 토대로 이들의 새로운 중국 구상이 과연 중국인들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인 전체에게 유익한 것인지를 되묻는다.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 중국과 비대칭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그들의 새로운 구상들이 어떤 실질적 의의를 지니는지를 비판적으로 점검하자는 의미다.


‘제국으로서의 중국’을 본격적으로 다룬 이 책의 에필로그는 비판적 중국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저자는 최근 유행하는 중국에 대한 해석과 저자 자신의 복합국가론을 대조하여 중국을 제국으로서 쉽게 이해하는 독법을 선보인다. 이로써 중국이 미국에 이어 패권국가의 바통을 이어받을지, 전혀 새로운 제국화로 나아갈지, 기존의 세계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해내는 창의적 길을 닦을지에 관해 계속 추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비롯한 중국을 해설하는 다양한 제국담론이 중국인뿐 아니라 “세계인 전체에게 요긴한 보편적 자산”이 되어야 한다고 못박는다. 


사회인문학과 동아시아공동체의 미래

“연구자이자 교육자이고 또한 편집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온” 저자 자신의 정체성에 걸맞게 이 책에서는 저자가 설정하는 새로운 과제인 ‘사회인문학’의 요소가 곳곳에 배어 있다. 사회인문학이란 인문학과 사회과학이라는 분과학문의 고루한 형식에 따라 철저히 나뉜 한계를 극복하여 “탈분과학문적 연구와 글쓰기를 현장의 실천경험과 결합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사회인문학이라는 새로운 시도는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생에도 미치는 바가 크다. 사회과학자들이 주목하는 “국가정책 차원의 동아시아공동체” “지역협력체의 제도화”를 비롯하여, 인문학자들이 주목하는 “개인들의 자발적 결합체” “비제도적 네트워크 구축”은 제각기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이 책은 사회과학과 인문학, 이 두가지 시선을 종합해내며 지역분화의 생생한 현실과 지역주의 구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그것이 “인간다움을 좀더 충실히 구현하는 지역적 공생사회, 곧 진정한 의미의 동아시아공동체로 향하는지”를 점검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꿈꾸는 동아시아 공생사회란 국가와 자본이 주도하는 제도적 동아시아공동체라기보다 진정한 공동체로 다가가는 ‘과정으로서의 동아시아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 담론은 그동안 “길 없는 길”이라는 어구로도 표현될 정도로 이론•담론으로서의 성격을 짙게 지녔던, 학계 내부의 논쟁이 주를 이루었던 산물이다. 저자가 지난 20여년간 자신의 연구주제를 뛰어넘어 벌여온 다양한 실천의 경험, 그리고 그 현장감을 살려 집필한 글들은 기존의 동아시아론의 한계를 충분히 보완하는 구체적 근거들이다. 


이 같은 생생한 활동이 한국•중국•일본•대만을 비롯한 다양한 시민사회의 자치와 연대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던 만큼, 동아시아 평화에 “선순환적 파급”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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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2013. 12. 6. 02:00




지구화시대 주체적 영문학을 위한 도정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로 꾸준히 활동하면서 영미문학연구회 공동대표, 한국문학번역원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실천을 펼쳐온 윤지관(덕성여대 영문학과 교수)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저자가 『놋쇠하늘 아래서』(2001) 이후 12년 만에 펴내는 단독 저서로, 그동안 실천적 영문학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저자의 학문적 결실을 모은 책이다. 이번 저서에서는 운동으로서의 문학연구, 실천으로서의 영문학 공부를 추구하는 저자의 열정과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화시대 번역이론과 번역의 실상을 다루는 제1부의 글들은 특히 저자가 한국문학번역원장으로 일한 경험이 깊이 녹아 있어 실천적이고도 생생한 통찰을 보여준다. 첫 글 「번역의 정치학: 외국문학 번역과 근대성」은 문학작품 번역에 대한 비평적 논의의 필요성을 환기하면서, 번역의 정치성 논의를 통해 번역론에서의 해체적 경향을 비판하고 원전에 대한 충실성의 의미를 되새기며 축자역(逐字譯)의 의미를 다시 살펴본다. 


「번역의 정치성과 사회적 기능」에서는 조지 스타이너, 자끄 데리다, 더글러스 로빈슨 등의 번역이론을 살피면서 언어제국주의의 대세 속에서 번역이 지니는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짚어본다. 저자는 중심부의 지배적 문화가 주변부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정치에서의 불평등이 번역에서의 불평등을 야기함을 지적하면서, 그럼에도 지배와 항거라는 번역의 이중적인 정치적 함의를 주목한다. 


지구화시대에 대응하는 중요한 저항과 보존의 공간으로서 번역의 의미와 세계문화 형성을 위한 쌍방향 번역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대목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인문정신과 번역」은 번역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고찰한 『바벨 이후』의 저자 조지 스타이너를 다루면서, 그가 해체론적 번역이론의 경향을 추종하지 않고 오히려 전통적이고 인문주의적 사고로 번역의 의미를 탐구한 데 주목해 인문정신의 회복이라는 과제와 연관지어 번역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사고해야 함을 확인한다. 


「언어·문학·공동체」는 기술발전에 의한 매체혁명의 큰 흐름에서 문학이 주변화의 위협에 처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영상 대신 언어, 문화 대신 문학의 창조성이 공동체라는 주제와 관련해 더욱 중요해짐을 거론하며, 「영어의 억압, 그 기원과 구조」는 영어가 우리 사회에 일종의 욕망이자 동시에 공포로 작용하게 된 과정을 살피면서 문화적 식민화와 자본주의세계를 당연시하게 만드는 영어교육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 「지구화에 대한 한 고찰」에서는 지구화가 중심 논제로 떠오르면서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 민족국가, 민족주의, 민족정체성 등을 살펴본다. 



제2부에서 저자는 지구화로 인해 더욱 중요성을 띠게 된 세계문학을 민족문학의 문제의식 속에서 고찰한다. 「경쟁하는 문학과 세계문학의 이념」은 지구화에 의해 촉진되는 문학의 세계화 현실을 짚으면서, 서구 중심적 세계문학을 재편하고 재구성하기 위해서 제3세계적 문제의식, 민족과 민족문학의 역할이 중요함을 지적한다. 


「세계문학 담론과 민족문제」에서는 서구의 모더니즘 문학과 문학의 탈민족화 현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유럽 중심의 세계문학 논의에서는 20세기 들어 모더니즘이 보편성을 획득하고 최근 탈민족화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으나, 식민 혹은 탈식민 사회에서는 리얼리즘의 기법과 정신이 폭넓은 보편성을 얻어왔으며 민족문학이 창조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문학 세계화를 둘러싼 쟁점들」에서는 한국문학이 무엇을 어떻게 세계에 내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을 번역할 때 가독성을 동반한 충실한 번역이 필요함도 언급한다. 「세계문학 번역과 근대성」에서는 한국에서 근대성 추구와 세계문학전집 출간 붐이 밀접한 관련성이 있어왔음을 지적한다. 


근대성의 상징형식인 서구의 장편 교양소설이 세계문학 정전의 주를 이루던 데에서 전통적인 교양소설의 위기가 모더니즘을 낳고, 20세기 이후에는 이 모더니즘문학이 정전화되어온 현실을 짚어본다. 「세계문학에 지방정부는 있는가」에서는 동아시아문학을 세계문학과 관련해 고찰하는데, 동아시아문학론이 서구 중심의 세계문학 질서에 개입하고 신자유주의 확산에 대처하는 지역적인 움직임으로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지역의 문학이 얼마나 통합되어 있고 대외적으로 얼마나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제3부의 글은 영문학 연구와 사회적 실천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라는 현장의 관심사가 주를 이룬다. 「타자의 영문학과 주체」는 한국에서 주체적인 영문학 연구를 위해 영문학 연구의 보편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보편주의 이데올로기의 함정을 피해갈 수 있는 길에 대한 모색으로, 그 과정에서 다루어지는 탈식민주의론에 대한 비판도 흥미롭다. 


「분단체제하에서 영문학하기」는 영문학 연구와 외국문학 연구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이른 백낙청의 ‘주체적 영문학 연구’론을 주체성의 의미를 중심으로 개괄하면서, 그것이 영미 학계를 포함한 영문학 연구 전반의 방향이나 모색 가운데서도 독창적이고 중요한 시도임을 밝힌다. 


「영문학 교육과 리얼리즘」에서는 리얼리즘 작품이 영문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리얼리즘을 강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현실에서 어떻게 리얼리즘을 가르칠 것인가를 궁구하며, 리얼리즘이야말로 영문학 교육을 현실에 대한 실천적 관심과 연결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근대성의 황혼」에서는 프랑꼬 모레띠의 모더니즘론을 살펴본다. 모레띠가 기존의 모더니즘 개념을 혁신적으로 해소하고 대신 ‘근대 서사시’라는 용어를 통해 『율리시즈』 『황무지』 『백년 동안의 고독』 등을 분석한 내용들을 찬찬히 훑어보고, 그의 논의가 제3세계 문학에 던지는 시사점을 확인한다. 


「과학자와 개혁가」에서는 영국작가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에 등장하는 리드게이트의 개혁자로서의 의사 모습, 미국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에 등장하는 칠링워스의 과학자로서의 의사 모습을 통해 근대성과 문학의 관계를 살펴보며, 「1867년 선거법 개정과 문학지식인」은 영국에서 노동자에게 선거권이 부여된 1867년 선거법 개정 당시 이에 대한 문학지식인의 태도를 조지 엘리엇과 매슈 아널드의 저작을 통해 살펴보면서 문학지식인이 지닌 계급적 한계와 아울러 문학지식인 특유의 진보적 측면을 고찰한다. 


영문학을 중심으로 번역, 영어, 세계문학 등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는 저자의 관심은 저자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 언제나 ‘영문학을 이 땅에서 공부하는 의미’에 대한 질문과 닿아 있다. 지구화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 현실에 기반한 주체성과 사회적 실천을 언제나 문제의식의 핵심에서 놓치지 않는 저자의 올곧은 작업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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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2013. 12. 6. 02:00


1970년 제64회 아꾸따가와상 수상작 「요오꼬」와 당시 심사에서 한표 차로 2위를 차지한 「아내와의 칩거」를 묶은 후루이 요시끼찌의 대표선집 『요오꼬·아내와의 칩거』(창비세계문학 22)가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 출간됐다. 후루이 요시끼찌는 인간 내면에 깊이 파고들어 유연하고 감각적이지만 날카롭고 생생하며 단단한 서정적 문체로 현대인의 불안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작품활동을 펼쳐온 일본문단의 대표작가로, 히라노 케이이찌로오의 표현처럼 “일반 독자들이 존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혹은 그 이상으로 소설가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소설가”다. 


‘내향의 세대’ 대표작가 후루이 요시끼찌

제64회 아꾸따가와상 수상작 국내 초역


초기작부터 시종일관 집요하고 꼼꼼하게 인간 내면 문제를 심층적으로 접근하여 다양한 가치가 전도하고 상호침투하는 애매한 양상을 서정적인 필치로 그려낸 후루이 요시끼찌는 당시 다소 편의적으로 사용되었던 ‘내향의 세대’라는 말에 정확히 딱 들어맞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1970년대 초 일본문단의 새로운 흐름을 대변하는 중심작가였다. 


‘내향의 세대’란 1970년 전후에 등장한 신진작가를 통칭하는데 후루이 요시끼찌, 쿠로이 센지, 오가와 쿠니오(小川?夫), 아베 아끼라(阿部昭), 사까가미 히로시(坂上弘), 고또오 메이세이(後藤明生) 등 주로 1930년대에 출생하여 1970년 전후에 하나의 문학경향으로 의식되었던 문학세대를 말한다. 원래는 1971년 문예평론가 오다기리 히데오(小田切秀雄)가 1960년대 학생운동의 퇴조와 이에 대한 혐오감으로부터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거리를 두기 시작한 당시의 신진작가나 평론가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었으나, 이 작가들이 당시 사회문제나 1960년대 전공투 세대의 문화적 감수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관점에서는 반드시 부정적인 명칭만은 아니다.


특히 후루이 요시끼찌의 경우, 주술적이고 민속학적인 주제가 줄거리 전개의 기조가 되고 있는 『고승(聖)』 『거처(栖)』등에서 당시 전공투 세대가 가지고 있었던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 흐름을 공유하고 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선 인간 내면의 탐구, 「요오꼬」


「요오꼬」는 대학생 S가 홀로 등산을 하다 깊은 골짜기 아래에서 정신질환으로 인해 몸을 일으켜 이동할 수 없는 요오꼬를 도와 함께 하산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몇개월 후 도시의 전철역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을 계기로 이 둘의의 연애가 시작된다. 방향감각의 혼란은 물론 혼잡한 군중들 사이에서 꼼짝 못하고 그대로 서 있을 정도로 정신적 노이로제가 깊어가는 요오꼬를 치유하고 그녀가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S는 다양한 만남을 시도하는데, 그러한 여러 방식의 만남이 연애의 주요 내용이다. 


칠년 전에 양친을 여읜 요오꼬는 현재 두 아이를 둔 언니 부부와 살고 있지만, 그녀의 언니도 이전에 요오꼬와 비슷한 정신질환을 앓은 적이 있다. 요오꼬는 언니의 부탁으로 집을 방문한 S에게 질병과 건강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얇은 막’에 머물며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다고 절실하게 고백한다. 처음에는 치료받기를 주저하다 결국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것을 약속한 그녀는 가을 창밖의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아아, 아름다워. 지금이 내 정점 같아”라고 중얼거린다.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요오꼬」는 1970년 8월 『문예(文藝)』에 처음 발표되었고, 1971년 1월 「아내와의 칩거」와 함께 묶여 카와데쇼보우 출판사에서 『요오꼬·아내와의 칩거』로 간행되었다. 이 작품은 독문학을 전공하고 가르쳤던 작가가 직접 일본어로 번역했던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이나 헤르만 브로흐(Hermann Broch)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77년에는 반 보꾸또(伴睦人) 감독이 영화화하기도 했다. 


「요오꼬」는 건강한 인간의 일상보다 질병을 앓고 있는 인간 내면을 선명한 이미지로 드러낸다. 작가는 평범한 인간들의 실생활과 괴리된 요오꼬에 대해 무한한 애착을 드러내면서 그녀의 질환도 기피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정신질환을 앓는 요오꼬의 관점에서 일상적인 현실을 거부하고 “자신의 병에 웅크려들고, 자신의 냄새 속에 잠겨들”어가는 그녀의 내면과 행동을 선명하게 묘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정상적인 삶의 평범한 반복성과 현대인의 위태로움과 연약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 일상적인 현실과 질환을 앓고 있는 비일상적인 삶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하며 상호공명하는 구도 속에 위치한다. 소설의 주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S와 요오꼬의 관계변화는 이러한 측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처음에는 의사와 환자 같은 관계로 시작했으나, 점차 그녀의 고통에 공명하게 되면서 S는 요오꼬를 돌보거나 도움을 주는 위치에서 질환에 대한 자기동일화로 인해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거나 도움을 얻는 위치로 전환된다. 이러한 형태로 상호의존적이며 공명하는 두 남녀의 관계는 작품 속에서 주고받는 연애방식의 가장 큰 특징이다. 소설의 중심이 남자 주인공도 아니고 여주인공도 아니며 두사람이 공명하는 관계 자체라고 평가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일상적인 내부 균열과 원시적·주술적 세계의 틈입, 「아내와의 칩거」 


「요오꼬」와 함께 경합을 벌였던 「아내와의 칩거」는 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고열로 쓰러져 집으로 돌아와 휴가를 내고 몸져누운 남편 히사오와 그를 간병하는 아내 레이꼬의 일주일간을 묘사하고 있다. 원제인 ‘쓰마고미(妻?)’는 고전에서 그 말이 유래하고 있는데 ‘아내와 더불어 그 속에 틀어박혀 사는 것’,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남편 히사오가 일주일간 출근도 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 좁은 아파트 밀실에 틀어박혀 지낸다는 뜻에서 이 말을 ‘아내와의 칩거’로 번역했다.


부부가 칩거하는 동안 평범한 일상을 낯설게 하는 다양한 비일상성이 부부의 내부에 개입한다. 남편은 평일 낮에는 목격할 수 없는 대낮의 자신의 아파트와 아내를 관찰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내도 집에서 몸져누워 있는 남편을 “생판 모르는 남자”로 인식하고 “이제부터라도 어려울 때마다 남편 모습 속에 생판 모르는 남자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불안해한다.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모습의 상대에 대한 인식은, 히사오가 “부부가 매일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이해할 수 없게 되”거나 “부부라는 현실”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의외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부를 내부로 볼 때 아파트 옆 단독주택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건축현장 일을 하는 남자들 무리와 신흥종교를 설파하고 종교집회 참석을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노파는 외부세계의 접촉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틈입은 고대적·원시적인 것이 도시적·현대적 공간에 침입해 들어옴을 의미한다. 이들은 모두 부부가 반복하고 있었던 비교적 평범한 일상에 불안정하고 익숙하지 않은 파문을 던진다. 일상적인 공간에 개입하는 비일상적이고 이질적인 요소는 가치관의 혼동과 혼란 및 관계의 불안정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아내와의 칩거」는 외부와 접촉이 희박해진 현대인들의 불안정한 현실이 무속적이고 이질적이며 생명력 넘치는 외부에 노출되었을 때 평온한 생활이 위협받는 양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일상현실을 뒤흔들 수 있는 틈이 생기기는 하지만, 두 남녀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평형감각 속에서 결국 이들은 다시 하나로 수렴되어가는 결말을 맞게 된다. 



posted by 아마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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