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소개 2013. 12. 6. 02:00




지구화시대 주체적 영문학을 위한 도정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로 꾸준히 활동하면서 영미문학연구회 공동대표, 한국문학번역원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실천을 펼쳐온 윤지관(덕성여대 영문학과 교수)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저자가 『놋쇠하늘 아래서』(2001) 이후 12년 만에 펴내는 단독 저서로, 그동안 실천적 영문학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저자의 학문적 결실을 모은 책이다. 이번 저서에서는 운동으로서의 문학연구, 실천으로서의 영문학 공부를 추구하는 저자의 열정과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화시대 번역이론과 번역의 실상을 다루는 제1부의 글들은 특히 저자가 한국문학번역원장으로 일한 경험이 깊이 녹아 있어 실천적이고도 생생한 통찰을 보여준다. 첫 글 「번역의 정치학: 외국문학 번역과 근대성」은 문학작품 번역에 대한 비평적 논의의 필요성을 환기하면서, 번역의 정치성 논의를 통해 번역론에서의 해체적 경향을 비판하고 원전에 대한 충실성의 의미를 되새기며 축자역(逐字譯)의 의미를 다시 살펴본다. 


「번역의 정치성과 사회적 기능」에서는 조지 스타이너, 자끄 데리다, 더글러스 로빈슨 등의 번역이론을 살피면서 언어제국주의의 대세 속에서 번역이 지니는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짚어본다. 저자는 중심부의 지배적 문화가 주변부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정치에서의 불평등이 번역에서의 불평등을 야기함을 지적하면서, 그럼에도 지배와 항거라는 번역의 이중적인 정치적 함의를 주목한다. 


지구화시대에 대응하는 중요한 저항과 보존의 공간으로서 번역의 의미와 세계문화 형성을 위한 쌍방향 번역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대목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인문정신과 번역」은 번역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고찰한 『바벨 이후』의 저자 조지 스타이너를 다루면서, 그가 해체론적 번역이론의 경향을 추종하지 않고 오히려 전통적이고 인문주의적 사고로 번역의 의미를 탐구한 데 주목해 인문정신의 회복이라는 과제와 연관지어 번역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사고해야 함을 확인한다. 


「언어·문학·공동체」는 기술발전에 의한 매체혁명의 큰 흐름에서 문학이 주변화의 위협에 처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영상 대신 언어, 문화 대신 문학의 창조성이 공동체라는 주제와 관련해 더욱 중요해짐을 거론하며, 「영어의 억압, 그 기원과 구조」는 영어가 우리 사회에 일종의 욕망이자 동시에 공포로 작용하게 된 과정을 살피면서 문화적 식민화와 자본주의세계를 당연시하게 만드는 영어교육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 「지구화에 대한 한 고찰」에서는 지구화가 중심 논제로 떠오르면서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 민족국가, 민족주의, 민족정체성 등을 살펴본다. 



제2부에서 저자는 지구화로 인해 더욱 중요성을 띠게 된 세계문학을 민족문학의 문제의식 속에서 고찰한다. 「경쟁하는 문학과 세계문학의 이념」은 지구화에 의해 촉진되는 문학의 세계화 현실을 짚으면서, 서구 중심적 세계문학을 재편하고 재구성하기 위해서 제3세계적 문제의식, 민족과 민족문학의 역할이 중요함을 지적한다. 


「세계문학 담론과 민족문제」에서는 서구의 모더니즘 문학과 문학의 탈민족화 현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유럽 중심의 세계문학 논의에서는 20세기 들어 모더니즘이 보편성을 획득하고 최근 탈민족화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으나, 식민 혹은 탈식민 사회에서는 리얼리즘의 기법과 정신이 폭넓은 보편성을 얻어왔으며 민족문학이 창조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문학 세계화를 둘러싼 쟁점들」에서는 한국문학이 무엇을 어떻게 세계에 내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을 번역할 때 가독성을 동반한 충실한 번역이 필요함도 언급한다. 「세계문학 번역과 근대성」에서는 한국에서 근대성 추구와 세계문학전집 출간 붐이 밀접한 관련성이 있어왔음을 지적한다. 


근대성의 상징형식인 서구의 장편 교양소설이 세계문학 정전의 주를 이루던 데에서 전통적인 교양소설의 위기가 모더니즘을 낳고, 20세기 이후에는 이 모더니즘문학이 정전화되어온 현실을 짚어본다. 「세계문학에 지방정부는 있는가」에서는 동아시아문학을 세계문학과 관련해 고찰하는데, 동아시아문학론이 서구 중심의 세계문학 질서에 개입하고 신자유주의 확산에 대처하는 지역적인 움직임으로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지역의 문학이 얼마나 통합되어 있고 대외적으로 얼마나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제3부의 글은 영문학 연구와 사회적 실천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라는 현장의 관심사가 주를 이룬다. 「타자의 영문학과 주체」는 한국에서 주체적인 영문학 연구를 위해 영문학 연구의 보편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보편주의 이데올로기의 함정을 피해갈 수 있는 길에 대한 모색으로, 그 과정에서 다루어지는 탈식민주의론에 대한 비판도 흥미롭다. 


「분단체제하에서 영문학하기」는 영문학 연구와 외국문학 연구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이른 백낙청의 ‘주체적 영문학 연구’론을 주체성의 의미를 중심으로 개괄하면서, 그것이 영미 학계를 포함한 영문학 연구 전반의 방향이나 모색 가운데서도 독창적이고 중요한 시도임을 밝힌다. 


「영문학 교육과 리얼리즘」에서는 리얼리즘 작품이 영문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리얼리즘을 강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현실에서 어떻게 리얼리즘을 가르칠 것인가를 궁구하며, 리얼리즘이야말로 영문학 교육을 현실에 대한 실천적 관심과 연결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근대성의 황혼」에서는 프랑꼬 모레띠의 모더니즘론을 살펴본다. 모레띠가 기존의 모더니즘 개념을 혁신적으로 해소하고 대신 ‘근대 서사시’라는 용어를 통해 『율리시즈』 『황무지』 『백년 동안의 고독』 등을 분석한 내용들을 찬찬히 훑어보고, 그의 논의가 제3세계 문학에 던지는 시사점을 확인한다. 


「과학자와 개혁가」에서는 영국작가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에 등장하는 리드게이트의 개혁자로서의 의사 모습, 미국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자』에 등장하는 칠링워스의 과학자로서의 의사 모습을 통해 근대성과 문학의 관계를 살펴보며, 「1867년 선거법 개정과 문학지식인」은 영국에서 노동자에게 선거권이 부여된 1867년 선거법 개정 당시 이에 대한 문학지식인의 태도를 조지 엘리엇과 매슈 아널드의 저작을 통해 살펴보면서 문학지식인이 지닌 계급적 한계와 아울러 문학지식인 특유의 진보적 측면을 고찰한다. 


영문학을 중심으로 번역, 영어, 세계문학 등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는 저자의 관심은 저자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 언제나 ‘영문학을 이 땅에서 공부하는 의미’에 대한 질문과 닿아 있다. 지구화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 현실에 기반한 주체성과 사회적 실천을 언제나 문제의식의 핵심에서 놓치지 않는 저자의 올곧은 작업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posted by 아마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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