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소개 2013. 12. 6. 02:00



동아시아론의 선구적 주창자가 제시하는 동아시아 평화•공생의 길

한국•중국•일본•대만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과 연대해오며 동아시아 담론을 명실공히 “새로운 지적 공론(公論)”으로 세워냈다는 평을 듣는 백영서(연세대 국학연구원 원장, 『창작과비평』 편집주간)의 신작 사론집(史論集)이 출간되었다. 국내 주요 계간지에 발표하며 이슈를 불러일으킨 글을 비롯해 해외학술대회 등을 통해 현지의 비판적 지식인들과 나눈 교감을 담은 글이 담겨 있다. 

전작 『동아시아의 귀환』(2000)이 냉전시대의 협소한 지역인식을 극복하는 참신한 전망을 제시하며 이후 10여년간 ‘동아시아 담론 풍작시대’를 열었다면, 이번 책은 과연 이 담론이 동아시아 국가 간 대립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어 공생사회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실증적이고 구체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실천과제로서의 동아시아’를 이해하는 네가지 키워드

이 책의 제1부 ‘실천과제로서의 동아시아’는 저자가 1990년대 초부터 숙성시켜온 동아시아 담론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해볼 수 있는 여러 키워드들을 논의하고 있다. 저자를 비롯한 동아시아론 연구자들이 선구적으로 동아시아론의 체계를 세운 90년대 초만 해도 많은 이들은 ‘87년 민주화 이후의 정세’ 아래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새롭게 발견된 것일 뿐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하는 편이었다. 이러한 안팎의 오해에 대해 저자는 “동아시아 담론이 19세기 말부터 논의된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사상사적 계보에 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실천적 과제임을 인정받고자” 했다.

전작 출간 이후 10여년이 지나 펴낸 이번 책은 ‘동아시아란 무엇인가’라는 여전히 논쟁적인 질문을 던진다. 동아시아는 기존의 ‘한•중•일 더하기 몇몇 국가’ 식의 고정된 지리 개념이 아니다. 동아시아라고 함은 동북•동남 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 전반이 공통으로 지닌 문화유산 또는 대대로 이어져온 지역 내 교류나 경험이 재구성되는 과정에 다름없다. 즉 고정된 실체가 아닌 변화무쌍한 과정으로서의 개념 설정이 필요하며 이는 이번 책에서 ‘실천과제로서의 동아시아’라는 개념으로 압축되어 표현되었다.

‘실천’과 ‘경험’을 통한 동아시아 바로 보기에는 다음의 핵심용어들이 필수적이다.
첫번째 키워드는 이 책의 프롤로그를 비롯해 책 전반에서 소개되고 있는 ‘핵심현장’이다. 저자가 꼽는 동아시아의 대표적 핵심현장은 진먼도(金門島, 대만), 오끼나와(沖縄, 일본), 개성(開城, 한반도) 등이다. 2010년 하또야마(鳩山) 총리가 오끼나와 미군기지를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번복하면서 그 이유로 당시 천안함사건 이후 미군 유지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 이는 바로 한반도 남북과 일본 등 동아시아가 핵심현장을 중심으로 어떻게 연동하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당시 오끼나와의 시위 현장을 찾은 저자는 만약 “우리 한국인이 6•15선언의 기조에 따라 남북화해를 심화시켰더라면…”이라며 쓰라린 회고에 잠긴다.

핵심현장을 수차례 드나들면서 현지 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저자가 느끼는 고민은 이뿐 아니다. 과연 현장의 구체성에 근거하면서 그로부터 사상적인 차원의 과제를 끌어낼 수 있는가? 이에 관하여 내놓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복합국가’다. 저자는 한반도 분단이라는 생생한 현실을 토대로, 남과 북이 서로의 국가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서서히 재통합하여 “단일형 국가가 아니라 한층 더 인간다운 삶을 구현할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가자고 제안한다. 이를 우리가 익히 아는 연방제 등의 ‘국가 간의 결합’이라고만 이해한다면 절반의 이해일 것이다. 복합국가론의 핵심은 오히려 ‘국민국가의 자기전환’ 즉 국가의 한계를 극복하는 사회 내부의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에 담겨 있다. 또한 재일조선인•이주노동자•북한이탈주민 등의 정체성이 지닌 다양함과 유연함을 끌어안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더해지면서 일견 추상적인 담론에 그칠 수 있는 지점에 생생한 실감을 더한다.

국가/탈국가 담론이 적용되는 공간은 비단 한반도뿐만 아니다. 지금 동아시아에서는 국민국가를 상대화하는 탈근대 담론이 주를 이루지만, 다른 한편 대만독립론이나 오끼나와독립론처럼 근대국가 형태를 지향하는 국민국가론도 그 세가 만만치 않다. 동아시아 전체의 이같은 현실을 다각도로 조명하며 저자가 벼려온 사상적 과제가 바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적 단일과제’ 즉 ‘근대의 이중과제론’이다. 적응과 극복이라는 얼핏 상호 이율배반적이라고 여겨질 법한 이 이론에 관해 다양한 주장을 곁들여 해설하는 부분(59~67면)은 매우 흥미롭다. 저자는 이론의 뿌리를 백낙청(白樂晴), 최원식(崔元植) 등에게서 찾으며 더 나아가 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의 근대초극론에서부터 쑨 거(孫歌) 등의 동아시아론까지를 섭렵하는데, 여기서 ‘근대의 이중과제론’은 곧 “상대를 변혁하고 자신도 변화하는” 운동으로서 자리매김된다.

2001년 대만과 일본에서 체류한 경험을 토대로 구체적인 실감이 더해진 ‘이중적 주변의 시각’이라는 키워드 또한 흥미롭다. 그는 두 나라에서 각각 “중국의 일부이기도 하고 중국이 아니기도 한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대만인”과 “한때 식민지였던 대만을 보는 일본인”들을 만난다. 이 두가지 얽힌 시각을 접하면서 서구 중심의 세계사 아래에서 비주체적 발전경로를 강요당해온 ‘동아시아라는 주변의 눈’과 ‘동아시아 각국의 권위주의하에서 억눌려온 주변의 눈’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이중적 주변의 시각’이라는 표현으로 압축해낸다.

현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몇가지 물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대화이기도 하다.” 저자의 이 말은 지금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다시 말해 한중관계사에서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을 변별하고 양자의 역학관계를 파악해내는 작업은 곧 한중관계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유효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다면 한중관계에서 그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책의 제2부 ‘주변의 눈으로 본 중국’에서는 양국 관계의 ‘비대칭성’ ‘근접성’ ‘한국(조선)의 지정학적 위치’를 ‘변하지 않는 것’으로, 또한 ‘변하는 것’으로는 ‘시민사회의 다양화’ ‘상호의존성 심화’ ‘제3자 강대국(일본•미국 등)’ 등을 꼽으며 임진왜란부터 청일전쟁을 거쳐 현재의 동북공정, 한류 등에 이르는 다양한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풀어내 이해를 돕는다. 국내에서 출간된 연구논문의 시기별 목록, 동료 연구자들에 대한 직접 인터뷰 등의 실증적 분석결과 등은 한국인의 중국 인식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로 손색없다.


흔히 중국의 일부로 인식하는 대만의 정체성에 대한 재인식도 필수적이다. 저자는 본인 또한 대만을 “중국의 한쪽”으로만 알고 있었다고 돌이켜보며 대만사회 내부의 인식을 파고든다. 즉 대만은 중국의 일부가 아니며, 대만 토착사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대만인으로서의 독자적 정체성”을 주목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에 관한 제2부 3장과 4장은 대만의 대표적 소설가 우 줘류(吳濁流)의 중국여행기와 필자 자신의 대만사(臺灣史) 연구를 위주로 중국과 대만,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다.


현대 중국에 관해 전세계가 주목하며 한편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제국으로서의 중국’이다. 저자는 왕 웨촨(王岳川), 쉬 지린(許紀霖), 거 자오광(葛兆光), 자오 팅양(趙汀陽) 등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들의 담론을 토대로 이들의 새로운 중국 구상이 과연 중국인들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인 전체에게 유익한 것인지를 되묻는다.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 중국과 비대칭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그들의 새로운 구상들이 어떤 실질적 의의를 지니는지를 비판적으로 점검하자는 의미다.


‘제국으로서의 중국’을 본격적으로 다룬 이 책의 에필로그는 비판적 중국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저자는 최근 유행하는 중국에 대한 해석과 저자 자신의 복합국가론을 대조하여 중국을 제국으로서 쉽게 이해하는 독법을 선보인다. 이로써 중국이 미국에 이어 패권국가의 바통을 이어받을지, 전혀 새로운 제국화로 나아갈지, 기존의 세계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해내는 창의적 길을 닦을지에 관해 계속 추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비롯한 중국을 해설하는 다양한 제국담론이 중국인뿐 아니라 “세계인 전체에게 요긴한 보편적 자산”이 되어야 한다고 못박는다. 


사회인문학과 동아시아공동체의 미래

“연구자이자 교육자이고 또한 편집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온” 저자 자신의 정체성에 걸맞게 이 책에서는 저자가 설정하는 새로운 과제인 ‘사회인문학’의 요소가 곳곳에 배어 있다. 사회인문학이란 인문학과 사회과학이라는 분과학문의 고루한 형식에 따라 철저히 나뉜 한계를 극복하여 “탈분과학문적 연구와 글쓰기를 현장의 실천경험과 결합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사회인문학이라는 새로운 시도는 동아시아공동체의 공생에도 미치는 바가 크다. 사회과학자들이 주목하는 “국가정책 차원의 동아시아공동체” “지역협력체의 제도화”를 비롯하여, 인문학자들이 주목하는 “개인들의 자발적 결합체” “비제도적 네트워크 구축”은 제각기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이 책은 사회과학과 인문학, 이 두가지 시선을 종합해내며 지역분화의 생생한 현실과 지역주의 구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그것이 “인간다움을 좀더 충실히 구현하는 지역적 공생사회, 곧 진정한 의미의 동아시아공동체로 향하는지”를 점검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꿈꾸는 동아시아 공생사회란 국가와 자본이 주도하는 제도적 동아시아공동체라기보다 진정한 공동체로 다가가는 ‘과정으로서의 동아시아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 담론은 그동안 “길 없는 길”이라는 어구로도 표현될 정도로 이론•담론으로서의 성격을 짙게 지녔던, 학계 내부의 논쟁이 주를 이루었던 산물이다. 저자가 지난 20여년간 자신의 연구주제를 뛰어넘어 벌여온 다양한 실천의 경험, 그리고 그 현장감을 살려 집필한 글들은 기존의 동아시아론의 한계를 충분히 보완하는 구체적 근거들이다. 


이 같은 생생한 활동이 한국•중국•일본•대만을 비롯한 다양한 시민사회의 자치와 연대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던 만큼, 동아시아 평화에 “선순환적 파급”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posted by 아마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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