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소개 2013. 12. 11. 08:17



사람들은 모른다

우리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태곳적 마음의 고향으로 떠나는 시적·철학적 생태에세이 


영화〈솔라리스〉에서 지구를 떠난 과학자들은 통풍구 앞에 붙여놓은 종이테이프의 펄럭이는 소리로 향수병을 달랜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소리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작가 브루스 채트윈은 요람을 흔들며 엄마들이 내는 쉬이∼ 소리가 아이를 잠재우는 데 효과가 있는 건 이 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와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태곳적 인간 삶의 보호막이자 밤의 피난처였던 나무와 숲은 수백만 년이 흐른 지금까지 모성의 이미지로 우리 유전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삶의 원초적 감성을 자극하고 더 큰 자연과 공명하며 사는 지혜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매혹하는 나무에게 인간이 품는 특별한 애정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닐까?


《수목인간》은 우리가 오랜 세월 깃들여 살아온 나무의 가치를 역사적·철학적·생태학적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구 생명의 요람이자 공존·공생·성숙·포용 등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존재로서 우리 곁을 지켜온 나무를 통해 뻗은 사유의 가지를 14개의 장으로 펼쳐낸다. 


여기에 정현종, 허만하, 백석, 오규원, 파블로 네루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등 저자가 사유의 길잡이로 삼은 시인들의 시 마흔여섯 편을 소개함으로써 시인의 참신한 시선에 포착된 인간과 자연, 그 새로운 관계의 미학을 감상해보길 권하고 있다. ‘수목인간’은 지구생물계의 꽃인 나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책임의 삶, 공조共助의 문화, 지속가능한 혁신의 길을 모색해온 저자가 자연의 한 매듭으로서밖에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생존 조건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저자는 생태맹生態盲에 빠진 우리 시대의 자연관에 일침을 가하고 소비자본주의에 물든 삶의 형태를 바꿔야 함을 이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자연에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다. 한때 자연을 정복했다고 믿은 오만함은 기후변화를 비롯한 각종 자연 재앙과 생태 위기 앞에서 무력함으로 변한 지 오래다.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 변화가 요청되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너무나 미약한 존재로서 인간이 자연 앞에서 느꼈던 경이와 겸허의 태도는 아닐까. 자연과의 공존·공생을 지향하는 생태학적 사고 전환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적 성찰과 번뜩이는 예지, 투명한 시의 언어로 빚어낸 사유의 풍경 속에서 나무와 마주한 저자가 펼쳐내는 생태평화의 길이 이러한 태도 변화의 밑거름이 되리라 믿는다.  


인간은 수목인간이다


인간은 수목에 감싸인 채, 의존한 채, 보다 폭넓게는 자연에 감싸인 채, 의존한 채 살아왔고 살아갈 운명 속에 있다. 인류의 생물학적 생존, 물질적 생존, 정신적 생존이 나무와의 오랜 공존 속에서 이루어져왔음을 우리가 모르지 않는바, 우리 모두를 ‘수목인간Homo Arboris’이라 호명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자연에 의존하지 않은 인간이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이는 단순히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과 자연은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수목인간’이란 나무와 나무를 둘러싼 더 큰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인간 그대로를 드러내는 말이다. 더불어 타 생물들을 포용하고 그들과 공생할 줄 아는 나무의 미덕을 지닌 인간상을 지향하는 말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려는 모든 것이 이 한 단어 속에 녹아 있다. 인간은 수목인간이다. 이보다 더 명징하게 지구라는 큰 생명 안에 살아온 인간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나무에게서 인간다움의 가치를 발견하다


나무는 성숙하는 일이 실제로 발상함을 당신 눈에 보여주네 / 꽃이 터지고 이윽고 시듦을 / 그늘이 태양의 속도에 따라 제 몸을 뒤틂을

                                                        -로셸 매스,〈전언을 기다리며〉에서

 

인류사는 문명화 과정 중에 사용한 이기利器의 재료에 따라 석기, 청동기, 철기 등의 시대로 구분된다. 그런데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재료는 아니지만 인류가 오랜 시간 가장 중요하게 사용해온 물질이 있다. 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가 19세기 이전의 모든 문명은 ‘나무의 자국’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인류는 오랜 시간 나무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 살아왔다. 철기나 청동기와 달리 자연 상태에서 바로 구할 수 있었던 나무는 유용한 가재도구를 비롯해서 정착생활에 필요한 농기구나 거주 공간인 집, 마차와 같은 이동 수단, 악기를 만드는 재료로서 인간의 문명화에 큰 기여를 했다.


이 책의 1부 ‘나무에 깃들여 산다는 것’에서 저자는 나무와 한 몸 되어 살아온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우리 삶의 기반을 이루며 인지하지 못할 만큼 가까이에서 우리 곁을 지켜온 나무의 소중함을 되새긴다. 그런데 나무의 소중함은 나무가 우리 삶에 중요한 자원이라는 점에 한정되지 않는다. 나무는 인간에게 인간다움의 가치를 일깨우는 특별한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위로 솟아 옆으로 퍼지는’ 나무의 생태에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기 삶을 드높이면서도 타인을 향해 뻗어나가는 자기 초월성을 발견하는가 하면, 여러 존재들을 품고 살아가는 나무에게서 고대 로마인들이 인간다움의 준거점으로 삼았던 ‘피에타스pietas’의 현현을 보기도 한다. 피에타스란 공동체와 부모에 대한 의무감을 뜻하는데, 이러한 책임은 ‘나’에 갇힌 삶에서 벗어나 우리의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윤노빈과 훔볼트가 인간 존재의 목적을 나무의 생태에 비교해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40∼41쪽)


저자는 또한 집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필리아oikophilia의 진정한 실천을 나무를 통해 확인하기도 한다.(60쪽) 고대인들에게 집은 오늘날처럼 사사로운 삶이 일어나는 내폐적內閉的 공간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집은 집을 둘러싼 타자들과 맺는 관계와 사랑 속에서 확장된다. “난 대로가 그냥 집 한 채”(정현종,〈나무에 깃들여〉)인 나무는 다른 존재들을 품고 오이코필리아 본래의 의미를 실천해온 특별한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나무의 생태를 통해 인간다움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저자는 지구생태계 속에서 여타 생명들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 삶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1부를 통해 깊이 성찰한다. 



나무라는 기적이 일으킨 지구 생명의 역사


저, 잿빛 나무를 보라. 하늘이 / 나무의 섬유질 속을 달려 땅에 닿았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사물의 맥락〉에서 


약 27억 년 전 지구에 생명의 기적을 불러온 미소생물이 바다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자기 증식 능력을 갖추고 광합성 활동의 부산물로 산소를 배출하기 시작한 시아노박테리아가 그것이다. 육상 식물의 선조 격인 이 박테리아의 활동으로 지구는 점차 다양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은하계 유일의 행성으로 변모해갔다. 이 책의 2부 ‘나무의 에콜로지와 지속가능한 미래’에서 저자는 나무의 탄생과 진화 그리고 그 생명 활동을 지구적 차원에서 조명하며 나무의 생태학적 가치와 숲 복원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나무가 지구에서 행한 기적의 핵심은 광합성 활동에 있다. 이에 대해 제12차 세계 광합성 회의에서는 뻔한 과학적 정의 대신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렸다. “매일같이 우리에게 빵과 와인을, 우리가 들이쉬는 산소를 주고, 우리가 아는 그 모든 생명들을 참 간단하게도 지탱시키는 식물의 기적.”(170쪽) 약 8분 동안 1억 5,000만 킬로미터를 달려온 태양에너지를 고작 수초 만에 지구 생물을 먹여 살리는 화학적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이 놀라운 활동에 걸맞은 정의이다. 


나무는 또한 그를 둘러싼 더 큰 자연과 공명하며 혹은 “에로스의 춤”을 추며 지구의 생화학적 과정을 혁신하고 지구 생물권을 풍요롭게 하는 데도 일조했다.(163쪽) “나무의 내부가 새로운 바깥이 되는”(허만하,〈나무를 위한 에스키스〉) 그 기나긴 과정이 지구 생명의 역사와 겹쳐져 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선사해준 존재. 이런 귀한 존재가 어떻게 우리 곁에 존재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기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녹색의 귀한 광맥”(프랑시스 퐁주,〈동물과 식물〉에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좀 더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나무가 앞으로도 본연의 삶을 통해 지구생태계를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도록 말이다. 



진정한 평화는 생태평화에 있다 


어린 꽃이여― 내 만일 네가 무엇인지를, 뿌리까지 모두 속속들이 / 모두 이해할 수 있다면 / 나는 신이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련만

                                  -앨프리드 테니슨,〈갈라진 벽 틈에 피어난 꽃 한 송이〉에서


우주 만유를 뜻하는 삼라森羅는 나무들이 끝도 없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모습을 그린 삼森에 ‘벌여놓다’라는 뜻의 라羅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무서우리만치 엄숙한 감정을 뜻하는 삼엄森嚴 또한 숲에서 연유한 단어다. 우리에게 무한한 우주 그 자체이자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던 존재, 그런데 이성과 기술과 자본이 세계를 지배하면서부터 숲은 야생의 생기를 잃고 이런저런 생물자원이 군집해 있는 장소로 변해버렸다. 미개발지, 미개척지, 자원 매장지가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숲이고 이를 우리가 필요한 만큼 이용해도 된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몰랐을까?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한 19세기에 이미 일부 임학자들 사이에서는 자연의 한계를 지적하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숲의 재생 기능과 사이클을 고려해 그에 맞는 임산물의 양을 조절·유지해야 한다는 ‘보속수확保續收穫’이라는 개념도 이때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 성장이라는 미명이 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지연시켜버렸다. 그 결과 자연에 대한 약탈은 오늘날 우리 모두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일례로 숲의 무분별한 남벌이 원인이 된 1998년 중국의 대홍수는 무려 중국 인구의 20퍼센트인 2억 4,000만 명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되기도 했다. 


저자는 숲의 파괴는 곧 삼중의 파괴라고 말한다. 숲에 사는 생물종과 생태계의 파괴 그리고 그것들이 공동으로 수행해온 생태학적 서비스의 파괴, 마지막으로 숲과 인류가 오래도록 관계 맺어온 감성의 파괴가 그것이다.(149쪽) 그는 무한정한 확대·발전·성장이라는 낡은 이념을 버리고 지속가능한 생태평화okopax라는 새로운 삶과 경제를 이제는 받아들일 때라고 역설한다. 

생태평화란 타 생물종과 서식지, 생물다양성의 보호가 인류의 삶과 문명의 보호와 직결된다는 사실, 자연의 존속 없이는 인간의 경제적인 삶, 생물로서의 삶 역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 체화하고 생태계 보호 활동을 삶과 경제 활동의 필수 사항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주디스 라이트의 시〈숲〉의 마지막 구절처럼 저자는 이러한 요청의 원천지가 어쩌면 숲 자신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조건 없는 애정을 베풀어온 존재가 우리에게 보내는 이 요청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탐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아 / 더 이름 붙이고 더 알 것들이 있어 / 내가 모은 꽃들 말고도 / 결코 시들지 않을 것― / 그 꽃들을 자라게 하는 원천인 진리가 있어

                                                                  -주디스 라이트,〈숲〉에서


지은이_우석영

1972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시골집 울안에 있던 감나무가 신기해 많이 올려다봤다. 나뭇가지에서 눈 녹아내리는 소리에 처음 봄을 알았고, 포도나무의 포도알에서 처음 여름을 알아챘다. 


가을을 가르쳐준 건 대추나무에 달린 붉은 대추알 빛, 모든 걸 버리고 십자가처럼 서 있던 감나무에서 겨울을 배웠다. 젊은 날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나무가 그리워 산을 찾아다녔다. 젊음의 불안과 열기를 다스려준 것도 차나무의 잎이었다. 나무에 대한 오랜 사랑을 풀어내며 이 책을 쓴 것도 마호가니 책상 위, 책을 쓸 때 영감을 선사해준 것도 창밖 너머 표범나무였다.  


연세대학교, 시드니 대학교 대학원, 뉴사우스웨일즈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뉴사우스웨일즈 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심미적 창조성의 존재론을 연구했다. 철학?사회학 연구자이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속가능성과 사회정의, 환경철학, 문명론, 심미적 창조성 등의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녹색당 선언》에 참여했고, 저서로는《낱말의 우주―말에 숨은 그림, 오늘을 되묻는 철학》이 있으며, 역서로《페어푸드》,《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등이 있다

posted by 아마데우스
:
신간소개 2013. 12. 5. 08:30




자본주의 ‘위기’ 이후, ‘사회주의’를 재구성하라

‘국가’ 중심 사회주의에서 ‘사회’ 중심 사회주의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자본주의의 '위기'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다. 시장 근본주의와 자본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구되고 있지만, 대안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사회주의’는 어떤가? 지난 세기 현실 사회주의의 성패에 대한 실망이 큰 탓에 신뢰를 얻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사회주의는 곧 국가주의라는 인식이 사회주의를 통해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200여 년 사회주의의 역사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의 다채로운 사상의 생태계가 존재했으며, '사회'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대안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사회주의 전통의 흐름을 돌아보고 그 재구성의 가능성과 기본 방향을 따져보는 일이 시급하다. 이 책은 이런 본격 탐구를 위한 입문서, 우리 시대 사회주의운동의 모색을 위한 중간결산표를 제시하고자 한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반대해 사회적 소유 혹은 공동 소유를 주장하고 시장 경쟁 대신 협동과 계획을 경제 활동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 이들의 이념 및 운동.’ 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규정일 것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를 강조하는 시각에서는 사적 소유를 부정하지 않는 일부 흐름만을 뜻하는 것으로 축소된다. 또 국가가 중심이 된 불안정한 평등 사회로서의 사회주의와, 자본과 국가를 모두 지양한 공동체라는 뜻의 ‘코뮌주의’를 구분하기도 하고,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관계도 복잡한 문제다. 사실 단 하나의 올바른 정의란 없다. 이 책은 사회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의 흐름과 역사적 변천 과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가운데 사회주의 이념-운동의 이모저모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의 역사적 의미가 우리 시대에 어떤 빛과 그림자를 드리우는지, 사회주의가 21세기에도 대안으로서 생명력을 잃지 않으려면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 모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사회주의는 과연 국가주의인가, 본디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했던 이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사회주의=국가주의 또는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라는 통념과 달리 ‘사회’를 발견하고 (산업자본주의와는) ‘다른’ 근대를 모색한 초기 사회주의자들, 사회적 민중 자치를 꿈꾼 길드 사회주의, 자본주의의 성장-성공 신화를 넘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이반 일리치와 앙드레 고르를 비롯한 사회주의의 다양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추적하는 이 책은 ‘사회 중심 사회주의’라는 사회주의의 또 다른 이상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사회의 길을 열어 보인다.

 

19세기 사회주의, ‘다른’ 근대를 꿈꾸다

 

이 책은 ‘사회주의’라는 근대의 이념-운동의 원점을 1789년 의 ‘프랑스대혁명’에서 찾는다. 부르주아 혁명이자 민중 혁명이었던 프랑스혁명은 봉기에서 헌법 제정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거치며 결국 부르주아지가 만들려는 질서 앞에서 민주주의의 약속이 배반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새 헌법은 길드(동업조합)의 해산을 명하고 직업별 노동조합을 금지했다. 새롭게 보장된 자유는 오직 부르주아에게 한정된 자유였다. 민중의 저항이 끓어올랐으나 공포정치, 테르미도르의 반동, 파리 코뮌의 무력화를 거치며 결국 프랑스대혁명의 승자는 자본가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확산은 막을 길이 없어 보였다. 자본가들에게 부와 권력이 쌓일수록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와 가족은 고된 노동과 빈곤, 삶의 황폐화와 씨름했다.

 

이 무렵 최초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등장했다. 근대 사회주의의 세 개창자, 즉 로버트 오언, 생시몽, 샤를 푸리에가 산업자본주의의 폐해에 맞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해답을 위한 실험을 펼쳤다. 생시몽은 심화되는 빈부격차 앞에서 복지국가의 이상과 노동자 정당의 결성을 구상했으며, 푸리에는 공동주택과 공공집회 장소, 복지시설을 갖춘 ‘팔랑스테르’라는 주거단지 설계를 통해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사회를 꿈꾸었다.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푸리에의 구상은 자본주의 대도시와 공장의 현실에 대한 고발이자 항의였다. 또 오언은 자신이 인수한 뉴래너크 공장에서 노동시간 단축, 새로운 노동조건을 실현했으며, 새로운 노동자 주거단지와 무상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를 세웠다. 실패하긴 했지만 미국에서 ‘뉴하모니’라는 이상촌 건설을 실험하기도 했다. 오언의 실험은 이후 영국에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노동자 자주경영과 대안화폐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운동의 목표는 ‘바로 지금 자본주의 아닌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했다. 프랑스의 생시몽주의자와 영국의 오언주의자들은 처음으로 ‘사회주의’라는 말을 활발하게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푸리에주의는 미국으로도 전해졌고, 에티엔 카베는 코뮌주의적 공동체를 제시했다. 루이 블랑은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이루어진 경제 체제를 제안했으며, 여성 사회주의자 플로라 트리스탕은 국경을 초월한 노동자 조직인 ‘노동자연합’을 주창했다.

 

그동안 마르크스주의에 가려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핵심 원칙들을 확인하고 정식화한 사람들이다. 그 원칙은 첫째 ‘사회’의 발견, 둘째 사회를 파괴하는 자본주의에 맞선 사회의 자기 보호와 반격의 필요성, 셋째 개인의 해방을 위한 사회 자체의 재구성, 넷째 자본 대신 사회가 근대 문명의 주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궁극의 목표였다. 그들에게는 사회의 자기 통치만이 대안이었다. 그래서 ‘사회’주의였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란 자본주의 대신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해야 할 근대 문명의 또 다른 길(들)이었다. 즉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근대(들)의 추구였다. “자본주의적 근대가 이미 극한을 향해 내달리는 지금, ‘다른’ 근대의 가능성을 탐색한 초기 사회주의의 시도는 우리에게 ‘가보지 않은 많은 길’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틈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9세기 초의 다양한 사회주의 흐름들을 종합하면서 동시에 이후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서 강력한 대안 역할을 할 다음 세대 사회주의를 정초했다. 두 사람은 정치경제학 연구에 역사적 관점을 접목해, 사회의 핵심 요소를 사회적 생산력에서 찾고 인간 사회의 역사를 생산력의 발전 과정으로 파악하는 독창적인 역사유물론을 주창했다. 이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다른’ 근대를 설계하는 이념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다음 사회의 기반과 주체, 가능성을 형성해가는 역사적 운동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정점에 이를 때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의 기회가 오므로, 자본주의의 승리는 사회주의의 최후 승리를 위한 사전 무대일 뿐이다. 혁명의 승리 이후,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발전시켜온 가능성을 계승하고 더욱더 발전시킬 것이다. 즉 역사유물론에 의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극한적 발전을 계승-재구성하는 기획으로 변신했다.

 

자본주의 발전과 사회주의 실현의 연관관계에 대한 이런 시각은 두 사람의 이상에 구체적인 전망과 실천력을 부여했다. 마르크스, 엥겔스에게 사회주의-코뮌주의란 무엇보다 분업이 극복돼 인간의 다양한 능력이 전면 발전하는 상태였다. 두 사람은 이런 비전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한 실마리를 자본주의의 발전 방향 속에서 찾았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기계를 통한 자동화가 진척됨에 따라 노동시간이 줄어드는데, 노동계급이 권력을 쥔다면 개인의 노동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되어 자유 시간이 늘어날 것이고, 이 자유 시간에 분업에서 벗어나 인간 능력의 전면 발전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활동이 벌어지리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평생의 탐구와 실천을 통해 최종 확인한 노동 해방의 역사적 가능성이었다.

 

마르크스, 엥겔스가 남긴 세계관과 역사관을 통해 동시대인들은 자본주의의 개선 행진을 두려움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 너머 새로운 세상에 대해 강렬한 기대를 갖게 되었다. 두 사람의 사상은 19세기의 막바지에 급속하게 서구 전체에 확산되었고, 각국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다른 사회주의 흐름들을 평정해갔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의 성공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유럽 사회주의 세계에서 독일 사민당이 누리는 권위 덕분에 독일어권 바깥에서도 마르크스주의는 점차 사회주의의 표준형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20세기 사회주의 ― 국가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회주의는 1930년에 소련에 등장한 체제, 좀 더 구체적으로는 ‘국가사회주의’의 의미로 통용되었다. 즉 시장 중심 자본주의와 대비되는 모종의 국가 중심 체제를 뜻하는 말이 된 것이다. 정치적 실천을 촉구한 마르크스, 엥겔스의 사상은 제2인터내셔널을 거치면서 국가 권력을 통한 ‘위로부터의’ 사회 변화를 옹호하는 이념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혁명 러시아는 이런 흐름을 하나의 모델로 정형화했다. 당-국가와 명령 경제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 국가사회주의 모델이 등장한 것이다. 당-국가가 양적 성장을 목표로 경제 활동을 장악하고 사회 전체가 철저히 국가기구의 명령 아래 움직이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대공황의 습격을 받은 서구 자본주의와 달리 놀라운 속도로 성장을 달성했다. ‘명령 경제’에 더 가까운 이 체제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의 표준 모델 역할을 하게 된다. 중국, 동유럽, 베트남, 쿠바, 북한이 모두 이 모델에서 출발했다. 일당 통치+전면 국유화+중앙집권형 계획이 곧 ‘사회주의’라는 공식이 20세기의 상식이 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처럼 혁명적 사회주의를 주창하면서 소련 사회를 비판하는 흐름이 없지 않았지만, 주류로 부상하지는 못했다.

 

서구 사회에서는 사회주의 이념-운동 중 개혁적 사회주의가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펼쳐졌는데, 그들 역시 자신들만의 연성 국가사회주의를 발전시켰다. 자유주의의 정치 전통과 결합한 서구의 사민주의에서는 다원주의가 보장되고 국가와 시민사회의 경계가 분명했다. 자유주의와 사민주의 진영은 ‘복지국가’라는 새로운 수렴지대를 만들었다. 완전 고용의 실현을 지향한 복지국가 시스템이 자리를 잡으면서 서구 유럽의 노동 대중은 중산층의 풍요와 안락에 동참하게 되었고, 복지국가를 성취한 뒤 서구의 사회주의는 국가 관리 자본주의 정도로 의미가 축소됐다.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의 전통 역시 지금 중국에서는 국가자본주의의 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회주의’라는 말에서 (‘자본’과 쌍을 이루는) ‘국가(기구)’를 떠올리게 되었고, 사회주의=국가주의라는 공식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사회’ 중심 사회주의 ― 사회 권력에 경제 권력과 국가 권력이 종속되어야 한다

 

사회주의=국가주의라는 인식이 강력한 현실에서, 이 책은 사회주의에 훨씬 더 다채로운 사상의 생태계가 존재했음을 드러내고, 다양한 대안 사회주의의 조류들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새로운 방향을 성찰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첫 번째 지점은 ‘사회 중심’ 사회주의다.

 

이러한 방향의 선구적 흐름으로 ‘길드 사회주의’가 있다. 길드 사회주의자들은 생디칼리슴(노동조합주의)을 새롭게 재구성해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토대 역할을 할 노동자 자치 기구를 ‘길드’라 명명했는데, 러시아의 공장위원회, 독일과 이탈리아의 공장평의회 등 노동자 스스로 기업을 관리하기 위한 다양한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노동자 협동조합이라는 19세기 사회주의운동의 이상이 20세기 초에 다양한 노동자 자치 조직들로 되살아난 것이다. 여기서 ‘자본’을 대체하는 것은 ‘사회’이지 그 대리자인 ‘국가’가 아니었고, 노동자 자치 기구들은 노동 현장에서 ‘사회’를 실체화하기 위한 조직들이었다.

 

옛 유고슬라비아연방도 이 방향으로 나아가, 노동자 자주관리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체제임을 선포했다. 시장 경쟁 체제를 함께 받아들인 자주관리 체제는 한계와 모순을 드러냈고, 민족 간 충돌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사라지면서 자주관리 사회주의 실험도 마감되고 말았지만, 노동자가 경영하는 기업들로 이루어진 체제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 자체가 역사적 성과였다. “21세기 사회주의는 자주관리 사회주의가 멈춘 바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스웨덴의 임노동자기금 구상도 선구적 시도 가운데 하나다. 스웨덴은 사적 자본의 지배 해체 방안은 곧 국유화라는 20세기 사회주의의 상식을 뛰어넘어, 자본의 초과이윤으로 기업의 신규 주식을 발행하고 이 주식이 노동조합 소유의 임노동자기금에 적립됨으로써 결국 노동자가 대다수 기업의 지배 주주가 되는 안을 구상했다. 자본의 상당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회화’ 조치인 이 안은 자본 진영의 반발로 좌절되고 말았지만,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에서 국유화 아닌 사회화 방안으로는 가장 앞선 시도로서 21세기 현재에도 충분히 혁신적이다.

 

그러나 노동자 자치는 첫걸음일 뿐이다. 기업 수준의 노동자 자주 경영을 넘어 전 사회적 민중 자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길드 사회주의의 대표 이론가 G. D. H. 콜은 개별 기업의 노동자 자치에서 출발해 노동자 대표들로 구성된 산업별 전국 길드-산업길드회의로 이어지는 체제를 구상했고, 생산 현장뿐만 아니라 소비, 교육, 보건 등의 영역에서도 민중 자치 기구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조직된 사회는 국가기구만이 아니라 다양한 민중 결사체로 권력이 분산되므로 자본주의보다 더 다원적인 성격을 띨 것이다. 인 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사회’의 역량을 실체화하고 의지를 대변할 자발적 조직들을 결성해야 하며, 자본이나 국가의 명령이 아니라 이들 조직 사이의 협력을 우리 삶의 주된 운영 원리로 삼아야 한다는 콜의 길드 사회주의 구상은 오늘 적극 재평가되어야 한다.

 

오늘날 탈자본주의 대안 사회의 기본 방향을 고민하는 많은 이들이 바로 이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팻 데바인의 ‘참여 계획’ 구상, 마이클 앨버트의 ‘참여 경제’ 모델이 그러하고, 미국의 좌파 사회학자 E. O. 라이트도 국가 중심 사회주의 대신 사회 중심 사회주의를 강조한다. ‘사회 권력’에 ‘경제 권력’ ‘국가 권력’이 종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 그래서 ‘사회’주의다. 이 원점을 재확인하기 위해 현대 문명은 너무 긴 우회로를 걸어온 셈이다.”

 

진보의 신화를 거부하라 ― 경제적 합리성에서 사회적, 생태적 합리성으로

 

그런데 사회 중심 사회주의의 방향은 사회의 기본 골격에 대한 논의일 뿐이다. 이런 골격으로 어떤 삶을 영위할 것인가? 개인이 바라는 좋은 삶은 무엇이고 사회의 목표는 무엇인가? 기존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이 내용이 자본주의의 성공-성장 신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는 서구 근대 문명이 낳은 쌍생아와도 같았다. 자본주의의 지속 성장과 지구 생태계가 빚는 충돌이 심각한 오늘의 사회주의는 이러한 관성을 뛰어넘어 새로운 이념을 제시해야 한다. 저자는 이를 위한 하나의 지표로 이반 일리치와 앙드레 고르의 사상을 소개한다.

 

가톨릭 사제 출신의 독창적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산업 문명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과학기술 발전에는 두 개의 분수령이 있다. 기술 발전이 인간 사회에 실질적 이득을 가져다주는 단계가 첫 번째라면, 산업화된 과학기술이 발전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두 번째 분수령이다. 일리치는 1970년대에 자본주의 중심부의 대다수 산업 영역이 두 번째 분수령을 넘어섰다고 진단했다. 발전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제한 없는 진보의 신화를 거부한 일리치는 산업 발전이 두 번째 분수령에 이르면 근본적 독점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산업의 작동 없이는 사회가 역량을 발휘할 수 없는 근본적 독점 상태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기존 사회주의에 대한 일리치의 통렬한 비판이자 그 반성에 대한 결정적인 기여다. 일리치가 제시한 대안은 산업 발전의 균형 추구로서 생존, 정의, 공생성共生性이라는 세 가지 가치를 주장했다. 새로운 사회의 토대는 생산력 발전의 균형을 찾아나가는 대중의 노력이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좌파 사상가 앙드레 고르는 마르크스의 ‘자유시간’ 구상에 일리치의 ‘자율성’ 강조를 결합해 ‘더 적게 일하고 더 많이 자유로워지는 사회’를 꿈꾸었다. 그는 생산력이 발전하면 사회주의의 토대가 마련된다는 명제를 해체하고, 자본주의가 수반하는 경제적 합리성이 노동자들에게도 뿌리내린 상황을 문제 삼았다. 고르에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경제적 합리성을 제한하고, 경제적 합리성의 지배 대신 사회적 합리성, 생태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노력이어야 했다. 20세기에 사회주의운동을 자본주의의 운명에 속박해버린 성장 강박이라는 족쇄를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고르가 제시한 방향은 마르크스와 일리치를 종합하는 것이었다.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해 자유시간을 늘리면서 산업 활동에 얽매이지 않은 자율 활동의 영역을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기업의 노동자 자치도, 사회 전체에 걸친 대중의 참여와 합의도 모두 이 목표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어쩌면 사회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사회가 경제보다 우위에 서고, 사회가 경제를 다시 흡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자본주의 문명의 ‘치유’와 ‘전환’ ‘새 출발’로서의 사회주의

좋은 삶에 대한 새로운 상식, 자본과의 대결, 새로운 ‘정치’의 발명

 

처음 등장할 때 사회주의는 근대 문명이 산업자본주의와는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설득하는 이념이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서서는 자본주의의 풍요로부터 배제됐던 계급이나 지역도 그러한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을 뜻하게 됐다. 시장 중심 자본주의와 달리 국가가 주도하는 근대화를 통해서 말이다. 그럼 21세기에 사회주의는 어떠한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이 책은, 자본주의의 장기 지속이 인간 사회와 지구 생태계가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모순을 누적시켜온 만큼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주도해온 근대 문명 전체의 ‘치유’와 ‘전환’ 그리고 ‘새출발’을 위한 프로젝트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과거 사회주의 이념-운동에 대한 근본 성찰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사회주의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21세기 사회주의는 ‘좋은 삶’에 대한 대중적 토론과 합의에서 출발해야 한다. 푸리에와 오언은 인간에게 좋은 삶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삶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각성에서 출발했으며, 청년 마르 크스도 좋은 삶에 대한 풍부한 사색으로부터 시작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인가, 아니면 더 적게 일하고 더 많이 자유로워지는 것인가? 이 물음과 그에 대한 답이 우리 시대 사회주의의 알파요 오메가다.

 

둘째, 과거 사회주의 전통에서 반드시 계승되어야 할 한 가지 원칙이 있으니, 자본 권력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그것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주류가 자본 권력을 해체해야만 대중의 민주적 성취를 유지하거나 확대해나갈 수 있다는 원칙을 포기해버린 것은 사회주의운동의 ‘퇴보’였다. 결국 사회주의의 본질은 노예 해방과 농노 해방에 뒤이은 또 다른 해방 운동이다. 노예 소유주와 봉건 영주의 권력을 과거의 유물로 만들어버렸듯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본 소유자의 지배권을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의 최대, 최후의 과제다.

 

셋째, 사회주의운동은 기성 정치 구조와 관행을 넘어서는 ‘정치’의 새로운 형태를 발명해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최소 민주주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자본 권력을 넘어선 사회 변혁은 불가능하다. 대중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형식과 에너지를 창출해 그 힘으로 대의민주주의를 혁신하고 국민국가 수준의 정치를 부단히 민주화해야 한다. 나아가 국민국가를 넘어 지구 질서 수준의 정치 활동 무대를 열어야 한다. 21세기 사회주의가 고민해야 할 것은 개혁이냐 혁명이냐가 아니다. 개혁이든 혁명이든 모두 과거와는 달라져야 한다. 20세기와는 다른 형태로 진화해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posted by 아마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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