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소개 2014. 3. 28. 14:14





음식을 남겨라, 당신 몸과 화해하고 싶다면


“접시의 크기에 따라서 먹을 것이 아니라, 포만감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요리를 담아낸 사람은 그날 우리가 느끼는 공복감의 정도를 알 리 없기 때문이다. ‘남기지 말고 먹어라.’ 어릴 적 수없이 듣던 말은 이제 잊어라!” ― 아리앙 그랭바시(영양학자)



건강법엔 정답이 없다는 것만 사실이다. 몸에 좋다는 것은 유행처럼 좇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소식(小食)의 경우도 그렇다. 누구에겐 소식이나 ‘1일1식’이 효과가 있어도, 누구에겐 영양 결핍만 초래하는 위험하고 무모한 시도일 수 있다. 그러므로 건강법을 적용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지금 자신의 상태를 바로 아는 것이다. 《심플하게 산다2: 소식의 즐거움》이 ‘몸과 대화하기’로 시작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너무 많이 먹고 있다


이 책은 ‘소식’을 주제로 다룬 여느 책들과 다르다. 적게 먹는 것이 몸에 좋으니 실천해 보라는 선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식이 몸뿐 아니라 마음도 성장시켜 인생 전반을 바꾸어 놓는 촉매제가 될 수 있음을 설득한다. 건강법의 한 종류로 한정되었던 소식이란 개념을 확장한 셈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소식을 해야 할까. 저자는 “지나치게 많이 먹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식품회사들에 있다. 좀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우리 위보다 많은 음식을 먹게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아이들 간식으로 바나나 한 개면 충분했지만, 오늘날에는 빅맥 세트?샌드위치?푸딩?냉동식품?초콜릿바?설탕이 든 음료수 캔 등을 정상적인 양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은 그 ‘단위’로 제시된 양을 전부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식품회사는 우리 위장이 그것을 다 소화할 수 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욕구에 대한 조정권을 그들에게 내맡긴다. 아무 생각 없이 단지 ‘한’ 개를 먹는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양을 누가 정했는지 한 번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누가 비스킷이나 크루아상 한 개의 크기를 정했을까? 식품회사들이 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자신들의 이익이다. ― 본문 55쪽에서



그러므로 소식은 원래 몸을 회복하는 방법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소식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덮어놓고 양을 줄이라고 하지 않는다.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하라 한다. 요즘 우리는 시간에 좇기며 허겁지겁 대충 끼니를 때운다. 비록 식사 시간이더라도 먹는다는 행위에 온전히 마음을 쏟지 못한다. 일을 하면서 먹거나 넋을 놓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씹는 둥 마는 둥 하기 일쑤다. 그 바람에 타고난 몸 안의 리듬이 깨져, 마음도 흐트러진 채 살아가고 있다. 삶이 고되고 공허한 이유다. 소식은 이렇게 어그러진 몸과 마음의 균형을 다시 잡아 준다. 이 균형이 평정심, 인간이 도달하려는 궁극의 상태다.  


우아하게 덜 먹자, 더 살자


몸의 소리를 듣게 되면, 지나치게 커져 있는 위장을 원래 크기로 돌려놓을 수 있다. 그러면 공복감과 포만감을 제대로 구별해 느낄 수 있다. 저자는 허기지지 않을 때 먹는 건 언제나 과식이라고 정의한다. 진짜 배가 고플 때 (조금 비싸더라도) 좋은 것으로 골라, 조금씩, 천천히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10분의 8 정도 찼을 때” 식탁을 떠나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억지로 이루어져선 안 된다. 억압당한 몸은 반드시 복수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이틀 과식을 했다면 이틀은 양을 줄이는 등 유연하게 실천하자.


소식을 하긴 하는데, 아무 곳에서 대충 아무 음식으로 때우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그런 기계적인 실천은 오래가지 못하거니와 정신 건강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자는 가장 좋은 음식은 자신이 요리한 것이며, 요리가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수련법임을 알려 준다. 따뜻한 음식 한 그릇을 요리하는 데 쓰는 10, 15분이 전혀 다른 인생길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요리한 음식은 가장 우아한 곳에서, 가장 세련되고 예쁜 그릇 혹은 접시에 담아 먹어야 제격이다. 우아한 곳이란 비싼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흩뿌리는 비를 감상할 수 있는 창문가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영화가 막 시작된 티브이 앞 혹은 햇살이 쏟아지는 발코니일 수도 있다.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것은 허겁지겁 걸신들린 듯 먹지 말자는 것이다. 매번 식사가 축제가 될 수 있도록 단조로움을 거부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을 찬란하게 만드는 비법이니 말이다. 


저자 도미니크 로로는 너무 많은 것을 소비하고 소유하게 부추기는 지금 세계에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유럽을 비롯한 36개국에서 100만 부 이상 팔리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심플하게 산다》에서도 이런 태도가 드러난다. 이 책에서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를 “끊임없이 배를 채워야 하는 소비 기계로 전락시켜 병들게 하는 사회”를 지적하며, “소비 중독이 자신을 상업적 투기와 이윤 추구의 희생양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잊고서, 소비의 유혹에 넘어가고 이용당하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 지은이_ 도미니크 로로 >>


프랑스 수필가. 소르본 대학에서 영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 미국, 일본 등지에서 교사로 일했다. 요가와 수묵화에 능통하고 자유, 아름다움, 조화를 삶의 지표로 삼고 있다. 동양적인 아름다움에 매혹돼 오랜 시간 일본에서 살며, ‘심플하게 사는 것’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쓴 《심플하게 산다》는 유럽을 비롯한 36개국에서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덜 소유하면서도 풍요롭게 사는 법을 계속 모색,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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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2014. 3. 20. 12:57



<< 책 소개 >>


살맛나는 세상을 꿈꾸는 인문학자의 현실 꼬집기!

이것이 바로 날카로운 비판의 맛!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이명원이 말하는 우리 사회 이야기. 이 책은 노무현과 이명박 그리고 박근혜 정권까지 사건과 사고를 돌아보며, 인문학자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시대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칼럼을 통해 만나는 그의 글들은 비판에 거침이 없다. 그의 소신 있는 정치적 발언은 답답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 시원하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어륀지’ 운운하는 말장난을, ‘당선인’ 운운하는 표현의 검열을, ‘소통’ 운운하는 거짓말을 아주 당연시했던 집단”이라고 꼬집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권하면서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만 한 연기 역량도 없어 보인다. 이명박 정부는 ‘아침 이슬’을 불렀던 참모들의 고언에 한 번쯤은 귀 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했다. 하지만 이 정부는 전락 직전의 오이디푸스처럼 당당하고 오만하다”며 일침을 날린다. 


괴물 같은 한국 사회, 유령이 된 사람들

‘유쾌하게, 상쾌하게, 신랄하게’ 욕이라도 하자!

“신문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캄캄해진다. 소리는 새어나오지 않지만, 

 간명한 보도기사의 이면에서 절규하는 인간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사태, 가족 동반자살, 청년실업, 노인 문제, 시간강사와 대학 문제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이슈도 지나칠 수 없다. 최근 한 여성 출연자의 자살 사건으로 논란이 된 <짝>과 남녀 연예인들이 출연하여 결혼생활을 가장해 연기하는 <우리 결혼했어요>와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오늘날의 연애 풍속을 고찰하는 글도 눈에 띈다. 그는 연애가 하나의 상품 소비와 유사해졌으며 <짝>은 자본과 외모가 정략적으로 결합하는 오늘날의 연애 풍속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4년제 대학을 나와도 대졸자 과반이 백수가 되고 취업자의 40%가 연봉 1,800만 원 이하 비정규직이 되는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 국민 소득은 2만 달러가 훌쩍 넘는데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하고 있고,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감의 수준은 바닥을 맴돈다. 이민을 가지 않는 이상 개인이 이러한 사회의 압도적인 하중을 피할 방법이 없다.  뉴스를 통해 대형 참사 소식이 들려오고,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소식이 들려오지만 사람들은 아픔에 동참할 줄 모른다. 불과 몇 년 사이,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까지 변했을까? 이에 저자는 ‘무통문명’ ‘식인사회’ ‘유령사회’란 개념을 언급한다. 


이런 냉소적 주체들이야말로 모리오카 식으로 말하면 가축화된 존재들이다. 이런 가축화된 존재들은 자신의 고통은 물론이고 타인의 고통마저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방식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식인사회를 용인한다. 타인을 희생양으로 만들면서 안심하는 사회, 그게 지금 한국 사회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_「무통문명 속의 식인사회」에서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삶의 영역 도처에는 유령화된 존재들이 넘실대고 있다. 도시에서 배제되고 추방되는 유령들뿐만 아니라, 4대강 막개발의 와중에 추방되는 유령들이 있고, 사회로의 연착륙을 봉쇄당한 거대한 집단의 청년 세대들이 유령으로 전락하고 있다. 인간만 유령화되는 것이 아니라, 구제역 파동 속에서 살처분되는 생명 일반이 ‘비용’의 차원으로 그 생명성이 탈색되어 비명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 실로 유령화는 오늘날 삶의 일반문법이 되고 있다. 

_「우리는 유령인가」에서



이러한 인문학적 통찰은 오늘날의 한국적 현실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시사비평가라든가 경제평론가, 혹은 정치평론가가 쓰는 칼럼과 인문학자가 쓰는 칼럼은 달라야 했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살맛나는 세상, 따뜻한 세상의 회복을 꿈꾸는 저자의 소박한 희망도 담겨 있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잃어가는 10대, ‘정규직이 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20대, 연애 불가능, 결혼 불가능, 육아 불가능의 ‘삼포세대’ 30대, 두꺼운 가면을 쓰고 ‘기계’처럼 일해야 하는 40대, 소통 불능인 집권 세력……. 이 책은 시대의 아픔에 눈감지 않고 우리가 함께 아파하고 공감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냉철한 비판 속에 뜨거운 문학적 감성이 묻어나는 이명원식 글쓰기를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저자 소개>>

이명원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서울시립대 국어국문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을 졸업한 후,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로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이라는 ‘따뜻한 낭만’과 비평이라는 ‘차가운 이성’을 오가며 한겨레, 주간경향, 시사IN, GQ 등 여러 신문과 잡지 등에 촌철살인의 칼럼을 써왔다. 


2004년 ‘한국의 미래 열어갈 100인(한겨레)’에 선정되었으며 상상비평상, 성균문학상, 한국출판문화상(저술 부문) 등을 수상했다. 『비평과 전망』 『내일을 여는 작가』 『실천문학』의 편집주간을 역임했으며, 현재 계간 『문화과학』의 편집위원이다. 저서로는 『타는 혀』 『해독』 『파문』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종언 이후』 『말과 사람』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등이 있다.


“나는 세계에 대해서는 다소 비관적이지만, 적어도 사람에 대해서는 낙관주의자다. 그것은 이 세계의 비참을 강화시키거나 약화시키는 것 모두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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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4. 3. 19. 17:14

 

 

 

학생들이 정작 알아야 할 것들을 모른다!

 

다시 고전(古典) 읽기를 권하는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인문학 여행!

 

『교과서 밖에서 배우는 인문학 공부』는 고전 읽기와 인문학 공부를 통해 우리가 더욱 절실한 앎과 마주하면서 미래의 길잡이를 찾아가 보기를 촉구한다.

현직 교사인 저자는 인류 역사 전체를 내다보는 눈길로 고전(古典)을 읽어내자고 권한다. 당장 학교 시험점수를 얻으려고 잡다하고 시답잖은(!) 지식을 쌓는 일을 잠깐 내려놓고, 인류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현실에서 고통스러운 문제가 무엇인지, 더 절실한 앎부터 마주할 것을 권한다. 기존의 교과서가 얼마나 허튼 내용인지 짚어보고, 미래의 길잡이가 될 만한 얘기도 들려준다.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 가르쳐야

 

“이른바 참교육, 무엇이 문제였던가? 선생들이 눈앞의 교실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는 많이 궁리하고 실천했지만, 정작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가슴 떨리게 고뇌하지는 않았다. 전교조가 탄생할 때에는 교사와의 만남으로 세상 보는 눈을 틔운 학생들이 꽤 많았다. 그들을 ‘전교조 (교사들에게 배운) 1세대’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뒤 2세대와 3세대는 뚜렷이 태어나지 못했다.

물론 참교육의 부재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요, 교사를 (주되게) 탓할 일도 아니다. 몇몇 큰 나라의 학생을 겪어본 교육자들의 소감으로는 딴 나라 학생들도 대부분 인류 공통의 절절한 역사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류의 미래를 개척해내는 데는 그 절절한 역사의 기억이 사활의 열쇠가 되거늘! 학교와 학문이 무너져 내리는 야만스러운 현실이야말로 지구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가장 큰 위험 요소다.”

그리하여 『교과서 밖에서 배우는 인문학 공부』는 ‘어떻게’보다 ‘무엇을’ 가르칠까를 위해 우리에게 담대한 의기와 깊은 지혜를 촉구한다. 아이들에게 솔깃한 예화를 찾고, 단지 생태나 환경, 통일, 인권 등만을 이야기하며 모둠 학습을 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의 영역 하나하나가 아닌 현실의 총체를 넘어서겠다는 목표를 세워야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다.

 

“교과서는 저리 가라!”-교과서를 잠시 내려놓고

저자가 보기에 고등학교 교과서는 여러 고전들보다 훨씬 어려울 뿐 아니라 한가로운 관조와 잡동사니 같은 사변적인 지식들로 가득 차 있다. 오히려 이 책에는 당장의 시험에 써먹지는 못한다 해도, 길게 보면 인문 공부의 눈을 틔워 주는 절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파우스트』를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 시기 상업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수탈의 서사시로 본다. 삐딱한 소설 『돈키호테』에서는 『호질』을 찾아본다. 세르반테스의 인생 역정이 녹아 있는 주인공 돈키호테에게서 황금시대를 찾아가는 불멸의 인간형을 찾아본다. 근대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경제이론은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의 ‘원자론’에 바탕을 두었음을 적시한다.

안티고네를 어디에도 제 자리가 없는 nobody지만, ‘법이 가 닿을 수 없는 삶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건 윤리적 영웅으로 본다. 세상에는 이름 없는 가녀린 ‘안티고네’들이 수없이 피었다가 속절없이 스러져갔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람다운 삶이에요.” 하고 외치며 국가권력의 횡포에 맞섰던 수많은 여성들. 아우내 장터에서, 한라산 기슭에서, 또 어디 노동의 현장에서 강자(强者)에게 맞섰던 숱한 여성들.

오디세우스의 키르케 이야기에서 세상의 또 다른 nobody들을 찾아본다. 프랑스 혁명의 제3신분, ‘아무것도 아닌 존재만이 모든 것을 대표할 수 있다.’ 시이에스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 시민(부르주아) 계급을 가리켜 똑 부러지게 이 얘기를 표현했고, 히브리의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종교사상 속에서 그런 보편성을 못 박아 단언했다.

저자는 국어 교과서뿐만 아니라 경제 교과서와 사회 교과서도 잠시 내려놓으라고 한다. 그 속에서 인류의 보편 가치를 찾아가는 이웃사랑이라는 명제를 끌어내본다. 온몸으로 밀고 가는 전투적인 이웃 사랑의 예를 종교의 개척자인 사도(使徒) 바울, 유관순과 전태일, 총을 든 게바라, 궐기한 전봉준의 사랑에서 무엇인가를 찾는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어느 해적이 스파르타쿠스에게 노예 수송을 해서 재물을 모으자고 꾀었다. “당신 이 로마제국에 맞서는 것은 달걀로 바위 치기가 아닐까?” 그가 대꾸했다. “노예 됨을 거부하고 싸워야만 우리는 사람이 되거든? 지고, 이기고는 그 다음 문제일세. 아니, 우리는 이미 이겼어.”-

‘영원함(불멸)’과 ‘진리(자유)’는 이 굽힘 없는 행동(실천) 속에만 깃든다. 그것은 미친 사랑이요, 참된 삶은 거기서 비롯된다.

 

참교육의 방향 전환을 위해-통합 수업의 모색

저자는 참교육을 향한 방향 전환의 목소리를 모아낼 결정적인 계기는 눈앞의 현상에 대해 분개하거나 꾸짖는 일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구조적인 힘’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이라고 본다. 교사들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주된 원인의 하나가 ‘주어진 교과서’에 있다는 것이다. 주어진 교과서에 의거해 시험을 봐야 하고, 또 학생들은 시험 성적에 목을 매달고 있으니 교사는 교과서에서 거의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통합 수업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우선 국어 교과서부터 짚고 넘어간다. 예전과 비교하면 국어 교과서의 내용이 풍성해졌지만 지금의 교과서는 ‘읽고 쓰기’ 말고도 ‘말하고 듣기’를 강조한다. 그 뜻과 취지는 공감할 구석이 있지만 그것을 ‘국어교과 수업’ 안에서 실현하기가 벅차다.

저자에 따르면, 말하고 듣기 공부는 학교에서 무슨 ‘토론대회’를 연다든지, 아니면 전교생이 다 같이 하는 어떤 프로그램을 배치한다든지 하여, 학교 전체 차원에서 궁리할 일이고, 어느 교과 선생이든 ‘토론하는 법’, ‘남의 말 귀담아 듣기’를 지도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국어교과가 혼자 떠맡을 일이 아니다. 국어책에는 ‘말하고 듣기’와 관련해 알아둘 내용을 담아서 읽힐 수는 있으되, 실제로 말하고 듣는 연습을 제대로 시키기는 버겁다. 체육책에 ‘헤엄치는 법’을 적어 넣는다 해서 그 요령을 읽는 것이 ‘헤엄치는 연습’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둘째, 지금은 세계가 하나로 얽혀서 돌아가는 21세기다. 우리의 미래를 개척할 ‘사회 단위’는 인류이지 민족이나 국민국가가 아니다. 저자는 ‘한국 문학’만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세계 문화와 인류 문명을 가르치겠다는 진취적인 관점을 품어야 한다고 본다. 세계 역사와 세계 지리를 아이들이 배운다면 문학도 세계문학을 배워야 한다고 본다. 셰익스피어와 괴테로부터 발자크와 톨스토이와 파블로 네루다와 20세기 아시아 아프리카 민족해방 문학에 이르기까지 세계 문학이 표현해낸 갖가지 사상과 인간 탐구의 내용을 말이다.

 

그리고 ‘문학’이 무엇을 담아야 할지, 인류의 인문적(文的) 흐름에 비춰서도 숙고해야 한다고 본다. 마치 몇 개 대학에서 예전의 ‘국어’ 대신에, ‘언어’ 또는 ‘커뮤니케이션’의 교재를 채택하듯이, 중고교 국어도 꼭 제목을 ‘국어’로 못 박고, 한국의 고대 문학과 근대 문학만을 신주단지로 모실 이유는 없다고 본다.

셋째, 인문사회 교과와의 관련성도 숙고해야 한다고 본다. 한때 ‘논술’을 어느 교과에서 맡아야 할지를 놓고 사람들이 떠들었듯이 그러니까 ‘어느 교과가 떠맡으라’고 해서 길이 찾아지지 않는다. 지금의 교과들을 대거 수정하고 ‘통합’해서, 또 이 통합교과를 지도할 만큼 선생들의 실력을 높여서 그 길을 찾아야 한다. 학교교육도 교과마다 칸막이를 하는 분업 체제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지도 따져야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쿠바에서는 중고등학교에서도 한 선생이 여러 과목을 다 가르치는 통합교육의 실험을 씩씩하게 벌여왔다. 이 사례는 우리에게 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이를테면 실제로 사회와 역사와 세상에 대해 잘 알아야 글쓰기를 잘할 수 있지, 수사법 공부는 논술에 곁가지 도움을 줄 뿐이다. 예컨대 1930년대 염상섭의 소설 『삼대』나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를 읽는 데서도 식민지 역사(사회)를 아는 것이 주된 공부이지 문학적 표현방법을 아는 것은 곁가지 공부에 불과하다.

학교 교과서로 수많은 아이들을 진정으로 미래를 개척할 줄 아는 능동적인 주체로 키워내려면 교육과정을 짜는 학자 집단과 교육 관료 집단이 먼저 100년 앞을 내다보는 선진적인 세계관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 헌신할 줄 아는 높은 윤리를 지닌 사회적 개인

저자는 쿠바 사회의 교육을 보면서 이웃과 사회를 위해 헌신할 줄 아는 높은 윤리를 지닌 사회적 개인의 배출이 인류사를 위해 교육이 할 일임을 느낀다. 우리는 ‘노동 해방 더하기 갖가지 인간 차별에서 풀려나기’쯤이 아닌 ‘근본적 인간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 인류가 저마다 파편화된 사적·이기적 존재에서 벗어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 함께 거듭날 때라야 인류 사회는 비로소 온전히 해방된 사회가 된다. 인류의 ‘유적(類的) 본질’을 회복하는 실존적 과제야말로 근대 사회가 안고 있는 최대의 숙제이고, 그 숙제까지 떠안는 사회라야 온전한 사회라 하겠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지금의 우리가 당장 그려야 할 그림은 무엇일까? 한 세대가 노력과 열정을 다했을 때 이뤄냄직한 목표는? 저자는 “우리는 그 가까운 미래상(未來像)을 ‘연대 사회’라 일컫는다.”고 말한다. ‘연대(連帶, solidarity)’란 서로 손잡고 함께 어깨를 겯는 것이다. 서로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힘을 합치게 돼 있다. 자질구레한 차이는 있어도 함께 큰 그림을 품고, 새 세상을 만드는 일에 함께 나서는 사회가 ‘연대 사회’다.

 

정은교 1973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들어갔다. 새내기 때, 남아메리카 민족독립을 증언한 책을 읽고 그동안 국가와 학교에 까맣게 속아 살았음을 깨달았다. 하도 분해서 동쪽 하늘로 주먹감자를 날렸다. 그 뒤로 대학교수들의 강의를 한갓 지푸라기로 여겨, 거의 듣지 않았다. 망자(亡者)를 추모하는 글 하나를 썼다 하여 한동안 감옥에 갇혔다. 입학한 지 13년 만에 대학을 운 좋게 졸업하고, 교사 노릇도 1987년 민주항쟁 덕분에 하게 됐다. 하지만 이태 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고 1,500명의 동료 교사들과 더불어 학교에서 쫓겨났다. 몇 년 뒤 겨우 교단에 돌아갔는데 국가 관료와 한 줌의 헛똑똑이 전문가들이 저희 멋대로 주물러서 내리먹이는 교과서와, 대학입시가 좌지우지하는 교육 현실에 도무지 순응할 수 없어 수업이 늘 힘들었다. 진보교육연구소를 다니며 간신히 선생 노릇을 버틸 힘을 얻었다. 지금의 한국인에게 가장 훌륭한 스승은 사랑뿐인 무학(無學)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고 여긴다. 자기는 감화(感化)를 주는 훌륭한 스승도, 유능한 교사도 못 되지만, 그래도 못된 선생놈으로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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