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소개 2013. 12. 7. 07:00




엄마의 남자가 나를 만졌지

그 순간 내가 피어났어


블루픽션상 수상 작가 박선희가 새롭게 그리는 과감하고 탐미적인 여성성의 신세계

한국 여성문학사에 기록될 희유한 전작 장편소설


거울 속에 갇힌 엄마와 엄마를 구원한 섬유예술가 M,

내 머리카락을 먹어치운 M과 그런 M에게 중독된 나,

이 낯설고 놀랍고 신비하고 괴기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엄마의 애인을 탐한 딸의 황홀하고 불온한 성인식
여성성의 깨어남과 갈등을 섬세하고 도발적으로 그린 박선희 장편소설

아름다워지기 위해 거울 앞에 붙박여 있는 엄마와, 엄마의 남매 같은 애인이자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인 섬유예술가 M, 이 두 사람 사이에 운명적으로 끼어든 ‘나’의 이야기를 다룬 『이브가 말했다』가 웅진문학임프린트 곰에서 출간되었다. 한 남자를 엄마와 딸이 동시에 사랑한다면 어떨까? 이 관계를 ‘금기’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동안 소설집 『미미美美』를 필두로 청소년 장편소설 네 권을 출간, 대산창작기금과 블루픽션상을 받은 소설가 박선희는 『이브가 말했다』를 통해 여자로서의 미묘한 갈등과 여성 특유의 심리를 가감 없이 풍부하게 풀어낸다. 기 발표작과 차별화된 소재, 단편에서 맛볼 수 있는 밀도를 장편에서 끝까지 밀고 나가는 문체에 시적이고 농염한 묘사가 빛을 발하며 박선희 작가의 새로운 작품 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신비아’는 삭발을 했지만 묘한 매력을 풍기는 스무 살 미용사로, 긴 머리카락을 모으는 중이다. 엄마의 애인인 섬유예술가 ‘M’을 사랑하면서부터 생긴 습관이다. 비아의 육체적 욕망과 관능이 깨어나면서 두 사람은 그들만의 머리카락 꽃을 만들고, 엄마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이브가 말했다』는 엄마의 남자를 욕망하는 스무 살 여자의 설익지만 도발적인 관능, 여자이자 딸로서의 복잡한 심리를 머리카락 꽃과 스킨헤드의 이중적 구도로 그려나간다. 왜곡이나 과장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여성성의 세계를 환상과 현실의 대비를 통해 탐미적이고 과감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소녀에서 여자로 자라난 스무 살의 이브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낯설고 놀라우며 신비하고 괴기스럽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이야기를 지어낼 때마다 매번 다른 인격이길 바란다.
『이브가 말했다』는 나의 여섯 번째 인격이 될 것이다.
인트로 서른다섯 문장을 썼을 때 가졌던 바람이 있다.
불편하더라도 버리지 못할 매혹이 있기를.

조금 색다른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빨간 장화에 노란 코트를 입은 여자의 뒷모습 같은 소설?
소설에 바쳐진 모든 시간은 상상을 하는 시간이었다.
달인처럼 잘 쓰기보다, 촘촘히 바느질을 하듯 처음부터 끝까지 공들여 쓰려고 했다.
실패하지는 않았다고 믿는다.
태양이 달걀 프라이처럼 풀어진 한낮에 읽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_ 「작가의 말」 중에서


▣ 사는 동안 한 번쯤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 빠질 때…
   묘한 아름다움과 카리스마를 풍기는 M을 둘러싼 기이한 삼각관계

비아의 엄마는 딸에게 어렸을 때부터 아름다워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또래 여자애들 중에서 단연 외모가 돋보인다. 중?고등학생 때 키가 훌쩍 자라 제법 성숙한 티가 났고, 정신연령 또한 친구들보다 높았다. 어느 날, 진작부터 ‘나와 너희는 다르다’라는 생각을 하던 비아에게 엄마의 애인인 M이 눈앞에 나타난다. 단둘이 있을 때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 말하는 이 아저씨가 비아에게 남자로 느껴진다. 그래서 이젠 엄마를 이해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이 M의 여자인 엄마가 싫고, 엄마의 남자인 M이 싫다.

엄마와 나와 M은 서로 다른 별에서 날아와 가족을 이룬 것처럼 특이한 삼각형을 만들며 어울려 놀았다. 물론 안나 아줌마가 함께 있었다. 나는 아줌마를 마음으로 제외시켰다. 아줌마도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세 사람을 하나로 묶어 말하곤 했다. 언젠가 나에게 이렇게 얘기한 적도 있다. 엄마와 아저씨, 너, 세 사람 언캐니한 트라이앵글 같아.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중학생이 알아들을 영어는 아니었으니까. 궁금했지만 설명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사전을 찾아보고 인터넷 검색을 해봤지만 정확히 어떻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렴풋이 그것은 낯설고, 놀랍고, 신비하고, 괴기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몇 겹으로 하나가 된 무엇 같았다. 안나 아줌마의 말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142쪽)

비아의 아빠가 사고로 죽기 전부터 엄마는 베네치안 거울 앞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정수리 머리숱이 눈에 띄게 줄면서 부분 가발을 쓰고 외모를 가꿀 때가 많아진 탓이었다. 
엄마가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로 짐작되는 곳으로 떠난 후에도 비아는 M을 종종 찾아간다. M이 진짜 머리카락으로 꽃을 만들었기에, 미용사인 비아가 손님들이 자르고 간 머리카락을 재료로 구해다 주었다. 머리카락 꽃을 하나씩 만들 때마다 그동안 몰랐던 비아의 몸의 감각이 깨어난다. M은 비아에게 “네가 원하는 걸 억압하려 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잠결이었다.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속눈썹들 사이로 눈부신 햇빛이 새어들었다. 바람이 불었다. 활짝 열린 창, 순백의 리넨 커튼이 부풀어 올랐다. 백만 개의 꽃잎이 흩날렸다. 진한 아카시아 향이 피부로 스몄다. 불온하고, 아른아른한 향이었다. 여름날의 햇빛이 긴 혓바닥처럼 쇄골을 핥았다. 습하고 더운 숨결이 목덜미로 떨어졌다. 목에서 어깨로, 등허리로, 가슴으로, 배꼽으로, 뜨거운 길들이 뻗어나갔다. 열 개의 손가락이 그 길들을 거꾸로 더듬어갔다. 배꼽으로, 가슴으로, 등허리로, 어깨로, 목덜미로…….(200쪽)


▣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그 후, 소녀와 엄마가 향하는 길
   머리카락 꽃과 불꽃이 만들어내는 진정한 카니발

엄마가 거울 앞에서 줄곧 지내왔던 것은 비아의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는 언제나 딸이라고 해도 좋을 나이의 여자 제자들을 사랑했다. 사진 여행을 갈 때마다 젊은 제자들과 동행해 엄마는 우울증이 심해지고, 외모를 가꾸는 데 집착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엄마가 이란갤러리의 관장으로 일하면서 M을 만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생기를 되찾는다.

아름다움을 강요했던 엄마 때문에 내 유년은 실종되었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른 채 나의 유년과 결별했다. 엄마가 기획한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멀리서도 눈에 띄게 구별되는 외모는 분명 엄마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 아이답지 않은 기품이 느껴진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중요한 건 바로 그거였다. 아이다움이 결핍되었다는 것. 반쯤은 태생적이기도 했다. 엄마와 아빠가 보통의 엄마, 아빠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거울에 갇힌 우울한 나르시시스트 엄마, 예술가이자 롤리타콤플렉스의 자유연애자 아빠.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 나는 아이의 세계를 건너뛰어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89~90쪽)

비아는 M과 관계한 이후로 머리카락을 모두 자른다. 그리고 M을 만날 땐 가발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머리카락이 풍성한 나’와 ‘삭발인 나’의 두 자아를 갖기로 한 이후부터였다. 소설 속에서 엄마와 비아, M, 세 사람은 “실선의 시간”이 아닌 “점선의 시간” 속에 각자 경계를 치고 살아갈 뿐, 특히 엄마와 비아는 두 개의 가면을 쓴 채 점점이 떨어진 그들의 시간을 살아간다.『이브가 말했다』는 소녀였던 비아와 우울함으로 가득 찬 엄마의 자아가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 지속적으로 주시한다.

충격은 양쪽 끝에서 나를 뒤흔들었다. M이 나에게 한 일에 대한 충격과 내가 그것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충격, 엄마의 남자와 한 일에 대한 충격과 죽을 것처럼 후회가 들지 않는 것에 대한 충격……. 나는 혼자 견뎌야 했다. 이 모든 충격이 결합하고 분열하고 폭발하는 시간을.(203쪽)

한편 스무 살 비아에게 비타민처럼 위로와 안식을 주는 사람은 ‘루’밖에 없다. 단, 만남의 조건은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건 알려고 하지 말기”. 기이한 트라이앵글에 갇힌 비아에게 늘 비타민이나 영양제를 먹이는 루는 조심스레 비아의 옆에 서 있다.
M과 모녀에게는 드문드문 난 점선의 시간을 실선으로 바꾸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아름다움과 욕망, 환희 뒤에 찾아온 고뇌와 성장, 기다림은 자연스러운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브가 말했다』에 그려진 ‘이브’의 나직한 고백은 ‘진짜’ 성인식을 시작하는 순간 또다시 이어질 것만 같다. 낯설지만 현실에 맞닿아 있고, 놀랍지만 신비하고, 괴이하지만 아름다운 이 이야기가 신비아의 목소리로 풀어져 나올 것이다.

머리카락을 생각하는 밤이다. 뼈도 살갗도 아닌 그것은 차라리 밤의 성분이다. 마침 머리카락 같은 ‘비가 걸어간다’. 그것은 자아 꽃을 피우려고 했구나, 언젠가 적도 근처로 떠났던 박선희 소설가와의 기억을 성글게 빗어본다. 나는 그와 일 년 동안 열여섯 개의 정거장에서 더러 마주쳤다. 검은 터널을 지나 목적지에 내리면 그는 풋내가 흥건한 십 대의 교실로 향하는 언덕길로 나붓나붓 걸어갔다. 이목구비가 없었지만 길고 길어서 단박에 알아봤다. 머리카락은 어수선한 생각을 가린 초라한 지붕이라 여긴 나로선 그 뒤 얼굴의 생기가 부럽고 얼떨떨했다. 이 소설을 읽으니 알겠다. 꽃을 쥔 산책인 줄 알았더니, 가위를 쥔 ‘음모’였던 게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다. 거울에 사로잡혀 수은처럼 피부가 말라가는 엄마가 사라지면, 딸은 거세된 머리카락을 쥐고 침실과 극장을 오간다. 엄마의 지문을 새긴 남자의 ‘죽어가는’ 꽃잎과 흰 젖이 필요한 사내아이의 알약을 훔친다. 검디검은 까마귀처럼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한 어느 날 계집아이는 한 줌의 머리카락이 불꽃의 가느다란 심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스물이 온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성장은 멈춰도 머리카락만은 여전히 자란다. 깜깜한 마음의 가시들은 하얗게 센 낮의 뿌리와 꽃으로 거듭한다. 그렇게 스물을 오려낸 그의 다음 시간은 어떤 색깔일까, 괜히 흩인 머리카락으로 ‘둥글게’ 트라이앵글을 만들어본다. _ 임수현(소설가)


posted by 아마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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