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3.12.09 :: 고은시집 - '무제 시편'
신간소개 2013. 12. 9. 02:00




세계 시단을 놀라게 한 고은 문학의 위업! 

‘세계적인 시인’이라는 호칭마저 새삼스러운 고은 시인이 한국문학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묵직한 시집 한권을 새로 내놓았다. 『내 변방은 어디 갔나』와 연시집 『상화 시편: 행성의 사랑』을 동시에 펴낸 지 2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 『무제 시편』이다. 이번 시집은 총 607편, 1016쪽에 이르는 그 방대한 분량으로 우선 압도적인 대작이다. 더구나 이 엄청난 시들은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 고작 반년 만에 씌어진 것으로, 여든을 넘기고도 식을 줄 모르고 오히려 폭발하듯 분출하는 시인의 창작열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광활한 시공간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도저한 사유와 유장하고 분방한 언어로 완성된 이 거대한 시집은 가히 한국문학뿐 아니라 세계 시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위업이라 할 만하다. 

폭발하는 열정으로 완성한 607편, 경계를 넘어선 거침없는 시의 모국어

옛 시에서는 ‘곳[處]’이 ‘때[時]’이다. 이 말이 후대의 내 말인 줄 누가 알았으랴. 나에게 시의 ‘때’가 곧 시의 ‘곳’인 것.//‘죽을 때도, 죽어갈 때도 시를 쓸 수 있어?’라고 내가 나에게 묻는다면 즉각의 자문자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쓸 수 있다. 쓸 수 없다면 죽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정녕 이렇다면 시는 죽음 앞에서, 죽음 속에서 시이다. 궁극도 근원도 굳이 필요 없다.(「서문」 부분)

시집은 「무제 시편」과 「부록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제 시편」 539편, 「부록 시편」 68편, 모두 607편, 1016쪽에 이르는 방대한 시집이다. 더욱이 「무제 시편」은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 불과 반년 만에 씌어진 전작 시편이다. 수치로 따지자면 하루에 3편꼴로 ‘쏟아낸’ 셈. 시인은 올해 봄 이딸리아 베네찌아에 주로 체류하면서 4월 이딸리아 까포스까리 대학으로부터 명예 펠로십을 받고 5월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에 참가하였으며, 8월에는 칭하이 국제시인대회에 초청받아 중국을 방문하고 9월에는 22일간 시베리아를 열차로 횡단하기도 하는 등 세계 시단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이렇게 유럽과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곳곳을 오가는 여행과 체류의 사이에 폭발하는 열정으로 쏟아져나온 것이 이 「무제 시편」이다. 시인은 시집 서문에서 이 경험을 “시의 유성우(流星雨)가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내렸다”라고 돌이킨다. 그러나 『만인보』가 그러하였듯이 이 시집 또한 단순히 양의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꿰뚫어보는 예감과 시대에 맞서는 투철한 역사의식, 삶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이 어우러진 우주적 상상력의 시세계는 물론이고 가히 초인적이라 할 만한 이 ‘청년 시인’의 식을 줄 모르는 창작열에 경탄해 마지않을 것이다.

「무제 시편」, 명명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대자유, 모든 규정과 개념을 넘나드는 도저한 시정신

책을 덮는다 캄캄하다 캄캄하기만 하다//겨우/이 지상에는/붓다나 누구밖에 없다/너와 나밖에 없다//인간을 긍정하는 것도/인간을 부정하는 것도/인간밖에는/아무도 없다//풀도 물속 전갱이들도/달도/별들도/인간의 가치를 전혀 알 바 없다//이토록이나/모르는 대상이 인간이다 나이다//깊은 밤에 이르러 도달한 것/내 생애란/이 세상의 아무도/알 바 없는 그것//의미의 무의미 그것//캄캄하다/캄캄하다 자꾸(「무제 시편 529」 전문)

「무제 시편」을 통해 시인은 대륙과 대륙을 넘나들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도저한 시정신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으며, 한편 한편 비범한 시적 사유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은 추천사에서 이를 “찰나에서 찰나로 미끄러지는 죽음의 시편이요, 그 찰나 찰나가 해탈의 이행(履行)으로 되는 초월의 시편”이자 “자유, 대자유, 마침내 자유조차 잊는 그런 자유함”이라고 찬탄한다. 시를 둘러싼 모든 편협과 속박마저 떨치고 ‘시의 모국어’라 할 드넓은 대지를 탐사하는 이 대시인의 발길은, 달리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 시의 독보적인 성취이자, 한국문학뿐 아니라 세계 시사에서 유례가 없는 위업이라 할 만하다. 
시인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서 온 생애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뇌하며 세상 만물과 “어제의 나/그저께의 나만도 못한 오늘”(「무제 시편 63」)을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되새기고, “언제까지나 목마른 세상 내려다보”(「무제 시편 6」)면서 “만성(慢性)의 번뇌 행렬”(「무제 시편 1」)을 좇아 “더 가야 할 시의 길”(「서문」)을 찾아 나선다.

감히 나는 내가 흑조(黑潮)임을 선언하노라/내가 뭍 골짝 개울이 아니고/허허벌판 난바다를 휩쓸어/나의 길 한 마당을 이룬 흑조임을 선언하노라//감히 나는 달의 맹방(盟邦)임을/새삼스러이 선언하노라/지상의 아수라 국가들의 수교 따위가 아니라/나의 영원한 위성 달빛과의 우정을 선언하노라//(…)//그 어느 바다 연해인들/그 어느 대륙 연안인들 곶인들/그 어느 반도 부속 도서인들/그 어느 암초 산호초인들/아 그 어느 심해 해저인들/나의 의지 고루 펼쳐져 가 있음을 선언하노라//(…)//나는 흑조임을 선언하노라 내 절망과도 같은 명예로 선언하노라(「무제 시편 3」 부분)

금방이라도 쏟아져나올 듯 일상 속에 늘 시가 울먹울먹 차 있는 시인에게는 문학이 삶이고 삶이 곧 문학에 다름 아니다. “오직 이 세상의 삶 하나로 살아야 할”(「무제 시편 114」) “숙연한 삶 가녘에/내 삶은 송구스러운 더부살이의 삶”(「무제 시편 4」)일 뿐이라고 낮추어 말하지만 시인이 어둠의 시대를 치열하게 관통해왔음은 익히 아는 바이다. “이제 타버릴 일만 남은/재가 될 일만 남은 세상”(「무제 시편 97」)에서 시인은 “세상 최악의 것인/이데올로기들”(「무제 시편 105」), “이놈의 결과주의/이놈의 근본주의/이놈의 실용주의”(「무제 시편 390」)를 다 내던지고 “시로부터의 해방인 시, 시로부터 시 아닌 시에의 하염없는 지향의 시”(「서문」)를 꿈꾼다. 이로부터 시에 있어서 “나의 정본(定本)은 없다”는 시인은 단호하게 말한다. “언어를 놔두라. 스스로 어긋나게 하라. 스스로 미쳐 날뛰게 하라. 스스로 자지러져 불타고 물결치게 하라.”(「서문」)

나의 시는/다른 시를 죽였다/나의 언어는/어제의 언어와/내일의 언어를 쫓아냈다/모든 언어는/모든 시대를 등졌다/모든 삶은/모든 삶의 9할을 놓쳤다//그 피와/그 피눈물과/그 뼈와 살점의 고통들을/그 순결한 욕망들을/그 멍한 희망들을/가장 먼 곳에서/흰 구름과 아지랑이로 지웠다//너무나 미혹의 언어로/너무나 매혹의 언어로/진실이 아니라/진실의 그림자에 매달렸다//나의 시는 죄이다/나의 시는/징벌을 앞두고/징벌을 모른다(「무제 시편 10」 부분)


「부록 시편」: 시인의 또다른 미래를 예감하는 새로움

이어지는 「부록 시편」은 「무제 시편」과는 별도로 『상화 시편』과 『내 변방은 어디 갔나』 이후 발표한 근작시를 간추린 것이다. ‘부록’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나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한권의 시집으로 묶기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시인 역시 애초에 「무제 시편」과는 별도로 엮을 생각이었던 것을 “안성 시대를 마감하는 내 최근의 동정(動靜)에 따라 부록으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어제 그제 그대로/그냥 시인”으로서 “날마다 절정이었”던 30년간의 안성 시대를 마감하고 “또 하나의 해설픈 시작을 위하여”(「안성이여 안녕」) 최근(2013년 8월) 수원 광교산 자락에 터를 잡은 시인의 감회가 오롯이 담겨 있다. 더불어 “지상의 한 장소에서/다른 장소의 진실들을 꿈”(「어느 전기」)꾸는 “욕망으로부터 가비야이/문명으로부터 가비야이/언어로부터/삶과 죽음으로부터 가비야이/9차원”(「하직」)의 세계로 나아가는 시인의 변모를 또한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한시(漢詩) 5편(「달마 보내기」 「절로 읊조리기〔自吟〕」 「안부」 「행로난(行路難)」 「무제」)을 읽는 새로운 맛도 즐길 만하다. 

‘성(聖)’과 ‘선(仙)’조차 뛰어넘는 시인의 새로운 경지

올해로 등단 55년에 이른 고은 시인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 그대로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젊은 시절 “고은 시집을 공부 삼아 읽다가 그만 뿅 가버렸다”는 한 시인이 일찍이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 여전히 청춘으로 사는 귀신”(안도현, 『내 변방은 어디 갔나』 추천사)이라 이른 바 있거니와, 오늘 또 한 젊은 시인은 “시 없이는 이미 죽었을 사람, 시 있어서 평생 살아남을 사람, 도통 시로밖에 설명이 안되는” “천상 시인”(김민정, 추천사)이라고 명명한다. “나는 돼지가 되어서도/시인이련다”(「궁한 날」)고 당당하게 말하는 ‘영원한 청년 시인’. 도무지 시인으로서의 높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경이로운 존재. 이 불가해한 시인을 우리는 ‘시공을 넘나드는 시귀(詩鬼)’라고밖에는 달리 이를 말이 없을 듯하다. 이로써 시인은 마침내 ‘성(聖)’과 ‘선(仙)’을 뛰어넘는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하나의 밤을 온전히 지새운 아침 이슬을 밟는다/갖은 지상의 욕망들을 재운 뒤/저 혼자 남겨진/아픈 그리움으로/혹은/아픈 외로움으로 정화될 대로 정화된 대기 속에/나의 숨결을 내보낸다//(…)//이로부터/저 고려의 처음인 묵은 광교의 지난날로부터/이제 막 태어난/태(胎) 비린내/젖비린내 나는 어린 삶의 시작이리라/그리하여 광교의 돌이리라 풀잎이리라 저녁 새들이리라/그리하여/침묵이리라 어느날의 천둥소리이리라/그리하여/수원 광교산/내일의/내일모레의 깃발 같은 앞과 뒤의 황홀이리라//이로부터/광교의 푸른 하루하루가 열리리라/오늘이 천년을 앞두고/오늘이 천년을 등지고 호호망망 열리리라(「광교에 들어와서」 부분)


posted by 아마데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