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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밖에서 배우는 인문학 공부

아마데우스 2014. 3. 19. 17:14

 

 

 

학생들이 정작 알아야 할 것들을 모른다!

 

다시 고전(古典) 읽기를 권하는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인문학 여행!

 

『교과서 밖에서 배우는 인문학 공부』는 고전 읽기와 인문학 공부를 통해 우리가 더욱 절실한 앎과 마주하면서 미래의 길잡이를 찾아가 보기를 촉구한다.

현직 교사인 저자는 인류 역사 전체를 내다보는 눈길로 고전(古典)을 읽어내자고 권한다. 당장 학교 시험점수를 얻으려고 잡다하고 시답잖은(!) 지식을 쌓는 일을 잠깐 내려놓고, 인류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현실에서 고통스러운 문제가 무엇인지, 더 절실한 앎부터 마주할 것을 권한다. 기존의 교과서가 얼마나 허튼 내용인지 짚어보고, 미래의 길잡이가 될 만한 얘기도 들려준다.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 가르쳐야

 

“이른바 참교육, 무엇이 문제였던가? 선생들이 눈앞의 교실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는 많이 궁리하고 실천했지만, 정작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가슴 떨리게 고뇌하지는 않았다. 전교조가 탄생할 때에는 교사와의 만남으로 세상 보는 눈을 틔운 학생들이 꽤 많았다. 그들을 ‘전교조 (교사들에게 배운) 1세대’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뒤 2세대와 3세대는 뚜렷이 태어나지 못했다.

물론 참교육의 부재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요, 교사를 (주되게) 탓할 일도 아니다. 몇몇 큰 나라의 학생을 겪어본 교육자들의 소감으로는 딴 나라 학생들도 대부분 인류 공통의 절절한 역사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류의 미래를 개척해내는 데는 그 절절한 역사의 기억이 사활의 열쇠가 되거늘! 학교와 학문이 무너져 내리는 야만스러운 현실이야말로 지구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가장 큰 위험 요소다.”

그리하여 『교과서 밖에서 배우는 인문학 공부』는 ‘어떻게’보다 ‘무엇을’ 가르칠까를 위해 우리에게 담대한 의기와 깊은 지혜를 촉구한다. 아이들에게 솔깃한 예화를 찾고, 단지 생태나 환경, 통일, 인권 등만을 이야기하며 모둠 학습을 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의 영역 하나하나가 아닌 현실의 총체를 넘어서겠다는 목표를 세워야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다.

 

“교과서는 저리 가라!”-교과서를 잠시 내려놓고

저자가 보기에 고등학교 교과서는 여러 고전들보다 훨씬 어려울 뿐 아니라 한가로운 관조와 잡동사니 같은 사변적인 지식들로 가득 차 있다. 오히려 이 책에는 당장의 시험에 써먹지는 못한다 해도, 길게 보면 인문 공부의 눈을 틔워 주는 절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파우스트』를 자본주의의 원시적 축적 시기 상업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수탈의 서사시로 본다. 삐딱한 소설 『돈키호테』에서는 『호질』을 찾아본다. 세르반테스의 인생 역정이 녹아 있는 주인공 돈키호테에게서 황금시대를 찾아가는 불멸의 인간형을 찾아본다. 근대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경제이론은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의 ‘원자론’에 바탕을 두었음을 적시한다.

안티고네를 어디에도 제 자리가 없는 nobody지만, ‘법이 가 닿을 수 없는 삶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건 윤리적 영웅으로 본다. 세상에는 이름 없는 가녀린 ‘안티고네’들이 수없이 피었다가 속절없이 스러져갔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람다운 삶이에요.” 하고 외치며 국가권력의 횡포에 맞섰던 수많은 여성들. 아우내 장터에서, 한라산 기슭에서, 또 어디 노동의 현장에서 강자(强者)에게 맞섰던 숱한 여성들.

오디세우스의 키르케 이야기에서 세상의 또 다른 nobody들을 찾아본다. 프랑스 혁명의 제3신분, ‘아무것도 아닌 존재만이 모든 것을 대표할 수 있다.’ 시이에스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 시민(부르주아) 계급을 가리켜 똑 부러지게 이 얘기를 표현했고, 히브리의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종교사상 속에서 그런 보편성을 못 박아 단언했다.

저자는 국어 교과서뿐만 아니라 경제 교과서와 사회 교과서도 잠시 내려놓으라고 한다. 그 속에서 인류의 보편 가치를 찾아가는 이웃사랑이라는 명제를 끌어내본다. 온몸으로 밀고 가는 전투적인 이웃 사랑의 예를 종교의 개척자인 사도(使徒) 바울, 유관순과 전태일, 총을 든 게바라, 궐기한 전봉준의 사랑에서 무엇인가를 찾는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어느 해적이 스파르타쿠스에게 노예 수송을 해서 재물을 모으자고 꾀었다. “당신 이 로마제국에 맞서는 것은 달걀로 바위 치기가 아닐까?” 그가 대꾸했다. “노예 됨을 거부하고 싸워야만 우리는 사람이 되거든? 지고, 이기고는 그 다음 문제일세. 아니, 우리는 이미 이겼어.”-

‘영원함(불멸)’과 ‘진리(자유)’는 이 굽힘 없는 행동(실천) 속에만 깃든다. 그것은 미친 사랑이요, 참된 삶은 거기서 비롯된다.

 

참교육의 방향 전환을 위해-통합 수업의 모색

저자는 참교육을 향한 방향 전환의 목소리를 모아낼 결정적인 계기는 눈앞의 현상에 대해 분개하거나 꾸짖는 일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구조적인 힘’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이라고 본다. 교사들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주된 원인의 하나가 ‘주어진 교과서’에 있다는 것이다. 주어진 교과서에 의거해 시험을 봐야 하고, 또 학생들은 시험 성적에 목을 매달고 있으니 교사는 교과서에서 거의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통합 수업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우선 국어 교과서부터 짚고 넘어간다. 예전과 비교하면 국어 교과서의 내용이 풍성해졌지만 지금의 교과서는 ‘읽고 쓰기’ 말고도 ‘말하고 듣기’를 강조한다. 그 뜻과 취지는 공감할 구석이 있지만 그것을 ‘국어교과 수업’ 안에서 실현하기가 벅차다.

저자에 따르면, 말하고 듣기 공부는 학교에서 무슨 ‘토론대회’를 연다든지, 아니면 전교생이 다 같이 하는 어떤 프로그램을 배치한다든지 하여, 학교 전체 차원에서 궁리할 일이고, 어느 교과 선생이든 ‘토론하는 법’, ‘남의 말 귀담아 듣기’를 지도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국어교과가 혼자 떠맡을 일이 아니다. 국어책에는 ‘말하고 듣기’와 관련해 알아둘 내용을 담아서 읽힐 수는 있으되, 실제로 말하고 듣는 연습을 제대로 시키기는 버겁다. 체육책에 ‘헤엄치는 법’을 적어 넣는다 해서 그 요령을 읽는 것이 ‘헤엄치는 연습’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둘째, 지금은 세계가 하나로 얽혀서 돌아가는 21세기다. 우리의 미래를 개척할 ‘사회 단위’는 인류이지 민족이나 국민국가가 아니다. 저자는 ‘한국 문학’만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세계 문화와 인류 문명을 가르치겠다는 진취적인 관점을 품어야 한다고 본다. 세계 역사와 세계 지리를 아이들이 배운다면 문학도 세계문학을 배워야 한다고 본다. 셰익스피어와 괴테로부터 발자크와 톨스토이와 파블로 네루다와 20세기 아시아 아프리카 민족해방 문학에 이르기까지 세계 문학이 표현해낸 갖가지 사상과 인간 탐구의 내용을 말이다.

 

그리고 ‘문학’이 무엇을 담아야 할지, 인류의 인문적(文的) 흐름에 비춰서도 숙고해야 한다고 본다. 마치 몇 개 대학에서 예전의 ‘국어’ 대신에, ‘언어’ 또는 ‘커뮤니케이션’의 교재를 채택하듯이, 중고교 국어도 꼭 제목을 ‘국어’로 못 박고, 한국의 고대 문학과 근대 문학만을 신주단지로 모실 이유는 없다고 본다.

셋째, 인문사회 교과와의 관련성도 숙고해야 한다고 본다. 한때 ‘논술’을 어느 교과에서 맡아야 할지를 놓고 사람들이 떠들었듯이 그러니까 ‘어느 교과가 떠맡으라’고 해서 길이 찾아지지 않는다. 지금의 교과들을 대거 수정하고 ‘통합’해서, 또 이 통합교과를 지도할 만큼 선생들의 실력을 높여서 그 길을 찾아야 한다. 학교교육도 교과마다 칸막이를 하는 분업 체제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지도 따져야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쿠바에서는 중고등학교에서도 한 선생이 여러 과목을 다 가르치는 통합교육의 실험을 씩씩하게 벌여왔다. 이 사례는 우리에게 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이를테면 실제로 사회와 역사와 세상에 대해 잘 알아야 글쓰기를 잘할 수 있지, 수사법 공부는 논술에 곁가지 도움을 줄 뿐이다. 예컨대 1930년대 염상섭의 소설 『삼대』나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를 읽는 데서도 식민지 역사(사회)를 아는 것이 주된 공부이지 문학적 표현방법을 아는 것은 곁가지 공부에 불과하다.

학교 교과서로 수많은 아이들을 진정으로 미래를 개척할 줄 아는 능동적인 주체로 키워내려면 교육과정을 짜는 학자 집단과 교육 관료 집단이 먼저 100년 앞을 내다보는 선진적인 세계관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 헌신할 줄 아는 높은 윤리를 지닌 사회적 개인

저자는 쿠바 사회의 교육을 보면서 이웃과 사회를 위해 헌신할 줄 아는 높은 윤리를 지닌 사회적 개인의 배출이 인류사를 위해 교육이 할 일임을 느낀다. 우리는 ‘노동 해방 더하기 갖가지 인간 차별에서 풀려나기’쯤이 아닌 ‘근본적 인간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 인류가 저마다 파편화된 사적·이기적 존재에서 벗어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 함께 거듭날 때라야 인류 사회는 비로소 온전히 해방된 사회가 된다. 인류의 ‘유적(類的) 본질’을 회복하는 실존적 과제야말로 근대 사회가 안고 있는 최대의 숙제이고, 그 숙제까지 떠안는 사회라야 온전한 사회라 하겠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지금의 우리가 당장 그려야 할 그림은 무엇일까? 한 세대가 노력과 열정을 다했을 때 이뤄냄직한 목표는? 저자는 “우리는 그 가까운 미래상(未來像)을 ‘연대 사회’라 일컫는다.”고 말한다. ‘연대(連帶, solidarity)’란 서로 손잡고 함께 어깨를 겯는 것이다. 서로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힘을 합치게 돼 있다. 자질구레한 차이는 있어도 함께 큰 그림을 품고, 새 세상을 만드는 일에 함께 나서는 사회가 ‘연대 사회’다.

 

정은교 1973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들어갔다. 새내기 때, 남아메리카 민족독립을 증언한 책을 읽고 그동안 국가와 학교에 까맣게 속아 살았음을 깨달았다. 하도 분해서 동쪽 하늘로 주먹감자를 날렸다. 그 뒤로 대학교수들의 강의를 한갓 지푸라기로 여겨, 거의 듣지 않았다. 망자(亡者)를 추모하는 글 하나를 썼다 하여 한동안 감옥에 갇혔다. 입학한 지 13년 만에 대학을 운 좋게 졸업하고, 교사 노릇도 1987년 민주항쟁 덕분에 하게 됐다. 하지만 이태 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고 1,500명의 동료 교사들과 더불어 학교에서 쫓겨났다. 몇 년 뒤 겨우 교단에 돌아갔는데 국가 관료와 한 줌의 헛똑똑이 전문가들이 저희 멋대로 주물러서 내리먹이는 교과서와, 대학입시가 좌지우지하는 교육 현실에 도무지 순응할 수 없어 수업이 늘 힘들었다. 진보교육연구소를 다니며 간신히 선생 노릇을 버틸 힘을 얻었다. 지금의 한국인에게 가장 훌륭한 스승은 사랑뿐인 무학(無學)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고 여긴다. 자기는 감화(感化)를 주는 훌륭한 스승도, 유능한 교사도 못 되지만, 그래도 못된 선생놈으로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한다.